즐겨보는 드라마 중에 <하우스 오브 카드>가 있다. 이 드라마에서는 정치인인 남편보다 훌륭한 자질을 많이 갖추었지만 남편의 조력자로서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할애하게 되는 클레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드라마 속에서 클레어는 언제나 세련된 복장에 흐트러짐 없는 자세는 물론이고 야망에서부터 문제해결능력이나 스트레스 관리 측면에서도 뛰어나다. 하지만 이런 멋진 클레어에게도 약점이 있었으니, 그녀의 가장 큰 약점은 그녀가 여성이라는 점이다. 클레어가 여성이기 때문에 겪는 곤란은 현실 여성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낙태수술을 했던 과거가 밝혀지면서 논란의 한 가운데에 서기도 하고 무례한 협상 상대방들에게 전혀 유쾌하지 않은 외모 칭찬을 들을 때도 많다.

이렇게 여성임을 은근히 주지시키는 외모칭찬과 같이 교묘하게 성차별적이고 부당한 상황에 닥쳤을 때, 이상적인 대응 방법은 듣는 즉시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다. “지금 그 말씀 성차별적 발언인 것 아시죠?”, “지금 성희롱하시는 건가요?”, “조선시대에서 오셨어요?” 라는 식으로 대꾸할 수 있다. 즉각적인 문제제기는 내 인격이 받은 타격을 즉시 바로잡을 수 있다는 점에서 좋다. 그리고 시간이 지났을 때 “그 땐 아무 말도 안 하더니 이제 와서 왜 그러느냐.”는 식의 언쟁을 피할 수도 있다. 물론 그것이 간단하고 쉬운 일은 아니기에 즉각적인 대응에 실패하고 집에 와 분노의 이불킥을 하는 때도 많을 것이다.

클레어의 경우는 어땠을까. 클레어는 자신의 드레스와 외모에 대해 언급하며 모욕을 준 상대방에게 즉각적인 문제제기로 응수하지는 않았다. 다만 시간이 흐른 뒤 의논을 핑계로 남성인 그를 여자화장실로 불렀다. 그리고 눈앞에서 거울을 보고 화장을 고치고 변기에 앉아 소변을 보면서 상대방에게 곤란과 수치를 그대로 되돌려주는 방식을 택했다. 물론 이것이 최고의 방식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클레어가 영부인이었다는 상황의 특수성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내가 이 장면에서 굉장한 통쾌함을 느꼈던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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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 의 클레어)

약자의 위치에 선 여성들이 필요치 않은 상황에서도 자꾸만 여자로서 호명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대부분의 경우 그 여성이 불리한 상황에 처하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로 남성은 본인이 남성이라는 것을 드러내기만 하여도 자신의 우월적 위치를 모두에게 일깨우는 효과를 볼 수 있다. 차별을 당하는 존재와 차별을 당하지 않는 존재의 차이는 이렇게 존재를 구분하는 것이 누구에게 유리한가로도 드러난다.

그러나 클레어의 경우 상대방을 여자화장실로 부름으로써 오히려 본인이 여성임을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자신이 여성임 그 자체로 상황을 역전시킨 것이다. 이 장면 안에서 여자화장실이라는 장소는 여자인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거의 유일한 세계로 보인다. 그곳은 화장을 고치는 것도 앉아서 소변을 보는 것도 내가 여자인 것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곳에는 대상화되지 않은 실존으로서의 여성만이 있다. 장소성을 기반으로 이루어낸 권력 위계의 전복과 이를 통해 상대에게 수치심을 그대로 돌려준 이 행동은 일종의 미러링으로 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남성의 질서가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세계인 ‘클레어의 여자화장실’에 남성으로서 군림하려는 자들을 불러내고 그들에게 더 이상 그들만의 질서가 용인되지 않음을 주지시켰을 때 우리의 화장실은 더 이상 죽임당하고 특정지어지고 몰카 범죄의 대상이 되는 장소가 아닐 것이라는 가설이다.

우리는 사회의 기울어짐과 부당함을 변화시키기 위해 언제나 스스로의 약자성을 드러내게끔 요구받는다. 우리는 차별받고 범죄의 대상이 되고 위험에 노출된 피해자임을 알리고 공표해야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 답답함 안에 놓여 있다. 그러나 스스로의 사적이고 내밀한 이야기를 얼마나 쏟아내야 이 사회는 변화할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공식적인 문제제기를 하였을 때 오히려 잘못이 없는 피해자에게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는 직간접적 경험도 너무나 많이 겪어왔다. 동지의 피해 사실 고백으로 인한 연상 작용으로 끝없이 폭력을 되새김해야하는 것은 또 어떠한가.

남성중심의 질서가 통용되는 세계에서의 문제제기는 대부분 실효성을 잃고 여성의 약자성만을 상기시키고 만다. 록산 게이는 <나쁜 페미니스트>에서 낙태와 같은 주제에 대해 이야기할 때 여성들이 자신의 낙태경험과 같은 내밀한 이야기를 털어놓아야 하는 것에 대하여 지적한다.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이후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피해사실에 대해 다양한 방식으로 증언했다. 어떤 이들은 그런 증언을 마주하는 것이 너무 힘이 들어 SNS활동을 휴식하기도 했다. 만일 내가 당한 피해를 내 주위 사람들과 관계자들에게 이야기하고 나의 사건을 예시삼아 변화를 촉구하는 일이 꼭 필요하고 좋은 방법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에 따르는 위험을 매번 감수해야만 하는 문제 상황에 봉착한다.

만약 클레어가 그 시점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상대방의 문제적 발언과 태도를 공식적으로 문제제기 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클레어는 지나치게 예민한 사람이 되거나 극 중에서 협상에 능숙하지 못한 사람으로 비난 받았을 것이다. 가령 사과는 받을지언정 군림한 자를 끌어내릴 순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자신의 낙태와 성폭행 피해 경험의 공개를 계기로 군대 내 성폭력 예방 제도에 힘을 쏟고 있던 클레어는 자칫 페미니스트로서의 이미지만 부각되어 다른 역할 – 클레어는 외교 활동에 뜻이 있었다 –을 맡는 데에 어려움을 겪었을 지도 모른다.

반면 ‘클레어의 여자화장실’과 같이, 약자성이 발현되지 않을 수 있는 안전한 세계에서의 대응은 오히려 실효성이 있지 않을까. 그곳에서는 ‘남성’을 설득하기 위해 힘을 빼지 않아도 된다. 또한 ‘남성’의 어쭙잖은 공감을 요청할 필요도 없다. 물론 ‘클레어의 여자화장실’이 어떻게 가능하느냐 묻는다면 완벽하게 답하기는 어렵다. 중요한 것은 남성중심의 질서가 통용되지 않는 세계로 ‘군림하려는 자들’을 불러내야 한다는 것이고, 만약 그러한 세계가 어디에도 없다면 한정적 공간과 시간만이라도 조성해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적 대응방식에 대한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면, 자신에게 안전한 공간과 타이밍이 주어지지 않았을 때에는 사건에 대한 즉각적인 문제제기를 망설여도 괜찮다고 말하고 싶다. 대신에 실효성이 있는 문제제기를 위한 불리하지 않은 환경을 조성하는 일에 공력을 쏟을 필요가 있다. 불리한 경기가 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언제나 싸움에 응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이기는 경기를 위해서는 결국 우리 손으로 경기장을 새로 지어야 할 것이다. 여성의 질서가 통용되는 세계를 더 많은 곳에 구축해야 한다. 온라인 게시판으로, 조직 내 여성조직으로, 친구들과의 세미나 모임으로, 축제로, 행진으로 말이다. 적극적인 정치활동을 통해 사회 속에 뿌리내린 남성 중심의 질서를 옛 것으로 만들고 우리의 요구를 담은 법과 제도를 구현해내야 한다. 멍청한 아재의 성희롱을 고쳐주기 위해 내 시간을 쓰지 않는 것이 뭐 어떠한가. 설사 썩은 농담에 웃어준다고 그게 그렇게 잘못된 일인가. 우리에게는 증언하고 목소리를 낼 권리가 있듯이, 원하지 않을 때 증언하지 않거나 응수하지 않을 권리도 있다. 화장실로 초대할 수 있을 때까지 조금 미루는 것도 괜찮다.

 

글쓴이: 김서린

편집자: Shyv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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