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봄, 페미니즘 스터디를 시작했다. 보수적인 소도시이기 때문에 스터디원을 모집할 때만 해도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대부분은 이미 페미니즘에 대해 자신의 확실한 의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덕분에 짧은 커리큘럼에도 다양한 주제들을 깊이 공부할 수 있었다.

이론 공부뿐만 아니라 학내 총여학생회 폐지와 같은 현실의 문제들에 대한 직접적인 행동에 결의하는 스터디원들도 많았다. 이번 강남역 사건과 관련해서 스터디원들과 함께 학내에 추모 부스까지 설치했다.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가 전무하던 학내에서 사람들과 이론 공부를 넘어 행동까지 함께할 수 있다니. 행복한 나날이었다.

이런 행복한 기분으로 스터디의 마지막 날을 맞이했다. 그날의 주제는 우리 스터디의 핵심 의제였던 여성혐오였다. 평소처럼 여혐 현상을 분석하고, 관련된 이론을 학습하고, 각자의 경험담을 털어놓고 속마음을 나누는 좋은 자리가 되겠거니 생각했다. 그리고는 술자리를 가지고 기분 좋게 헤어진 채, 여름방학 때 다시 함께 공부할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내 예상, 그리고 기존 스터디원 대부분의 예상과 반대의 흐름이 펼쳐졌다. 스터디에 처음 오신 분이 의문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왜 여성혐오라는 거친 단어를 사용하나요? 우리가 설득해야 할 대상인 비(非)페미니즘적인 여성들과 남성들을 적대시하는 용어가 아닌가요? 우리는 그런 거친 언어가 아닌 제3의 언어로 공론장에서 ‘그들’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해요.” 나는 당황했다. 참여 인원 대부분이 이미 미소지니(misogyny)의 번역어로서의 여성혐오에 동의했다는 사실을 전제로 스터디를 준비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반 페미니즘적인 사회에서 불편함을 느끼고 살아가던 사람들끼리 모인 터라 분위기는 늘 화기애애했고 서로의 의견에 대한 동의를 전제로 한 대화를 했지 논쟁을 한 적은 없었다. 우리는 최초로 토론을 하게 됐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대립각을 세웠다. 나는 페미니즘이 쉽게 피로해지는 이유는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기득권에게 페미니즘을 설득하려 들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설득 대상으로 상정하는 대부분은 결코 설득되지 않을,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이들이 자신들을 설득하려 애써야 한다고 믿으며 그 설득을 단번에 부정할 부류의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페미니즘은 설득하려 드는 순간 패배할 수밖에 없는 성질의 것이다. 설득하는 것과 설득 대상이 되는 것. 이 두 사이에 깊은 간극이 있고 이 간극은 그 자체로 위계다. 이 사회에서 ‘몰라도 되는 권리’를 충분히 누리고 있는 이들에게 ‘당신이 알아주었으면 좋겠다’라는 호소는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우리 스스로 기존의 권력을 강화해주는 것에 다름없다. 여성혐오라는 ‘거친 언어’ 대신 ‘불평등’ 따위의 온건한 단어로 한발 양보하는 것은 상대의 양보를 얻어내는 협상이 아닌 페미니즘의 퇴보일 것이라 확신한다.

방안에는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언쟁이라고 해도 무방할 말들이 오고 갔다. 예상 외의 분위기에 지친 표정의 사람들도, 계속 논쟁을 이어가고 싶은 사람들도 있었다. 강남역 사건 추모 부스를 운영한 경험에 대해 서로 생각을 공유하기로 했던 계획은 무산되었고, 우리는 계속해서 페미니즘이 누군가를 설득해야 하는지 아닌지에 대해서 논의했다. 당연히 결론은 내려지지 않은 채 스터디는 끝이 났고, 나는 피곤했다. 이 피로는 며칠간 지속되어 기분을 찝찝하게 만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나의 피로는 페미니즘에 관해 지나치게 방어적인 성향에서 발생한 것이다. 이 방어는 회피와 다름없다. 나는 여전히 “여성은 처음부터 시작한다. ‘같은’ 억압에 반복해서 대응해야 하고,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야 한다. 나는 이 고통을 거부한다. 그러므로 여성혐오 현상에 대해서 대응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라는 정희진의 말(<여성혐오가 어쨌다구?>)에 동의하지만, 과연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논쟁의 피곤함이 이 고통에 포함되는가? 아니다.

페미니즘을 공부하며 세계에 60억명의 사람이 있다면 60억개의 페미니즘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명제를 줄곧 되새겨왔다. 만약 상대의 페미니즘이 나의 페미니즘과 다르더라도 존중할 것. 이것은 얼핏 보면 나와 너의 차이를 존중하는 태도 같지만 나는 이 명제를 나의 도망침을 합리화하는 데 이용하고 있었다. 페미니즘이 개인을 넘어서 사회적 의미를 가진 집단 운동이 되려면 페미니스트들 사이의 충돌과 그 과정에서의 피곤함은 당연한 것이다. 이 충돌과 피곤함을 피하고 거리를 유지하며 ‘평화로운 페미니즘’을 추구하는 이상 어떤 유의미한 발전도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 학기 동안 새롭게 만난 이들과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비슷한 생각을 공유하는 이들과의 연대는 나에게 페미니즘의 새로운 장을 열어주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평화로운 연대를 넘어선 충돌과 갈등의 필요를 배운 것이 가장 큰 수확이다. 더 이상 충돌을 피하지 않고 다른 페미니즘과 마주하고, 손 내밀거나 맞서면서 변증법적인 페미니즘을 추구해나가고 싶다.

 

글: 성가연

편집: ㅊㅈ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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