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겸 배우 박유천의 성폭력 혐의가 하루이틀 사이에 온 매체를 뒤덮었다. 아니나 다를까 각종 2차 가해들도 그만큼의 자리를 꽉꽉 채우고 있다. 소위 ‘창녀’가 강간을 당한다는 개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한 것은 물론이고, ‘고소녀’, ‘고소 4호녀’ 등 ‘-女’라는 접미사로 피해자들을 칭하는 언론사들의 오랜 작태 또한 여전하다. 박유천의 주된 범행 장소였던 화장실을 소재로 삼아 드립을 치면서 이 사건을 희화화하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이는 머리가 나쁜 사람들, 심성이 못 돼먹은 사람들, 공감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이나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 글에서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2차 가해는 위에 든 사례들과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르다. 바로, ‘깨시민’들의 나라걱정이다.

 

해일이 몰려오는데 조개나 줍고 있을 겁니까?

깨시민이란 2012년경에 만들어진 조어로, ‘깨어 있는 시민’을 줄여서 부르는 비칭이다. 반새누리 성향, 반정부 성향, 반기업 성향을 가지는 것만으로 자신이 진보적이고 민주적인 사람이라 자임하(면서 실제로는 아무 말이나 막 내뱉)는 이들을 깨시민이라 부른다. 깨시민 개념에 대한 상세한 검토 및 성토는 이 글의 주안점이 아니니 이만 해두자.

이 호칭에 대해 대략 두 가지 정도의 거부반응을 예상해 본다. 하나는 ‘언제적 깨시민이냐, 최근의 현안을 다루기에 올드하지 않으냐’이겠고, 또 하나는 ‘그런 모욕적인 비칭을 쓰다니 이 글은 존중할 가치가 없어’이겠다. 사실상 이 글에서 다루는 사람들을 정확하게 칭하는 최신의 조어는 다들 아시는 ‘진보X치’일텐데, 나는 공공에 게시되는 글에서 은어나 신조어는 따옴표 넣어 사용하더라도 비속어는 사용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보수적인 글쟁이라 차마 그 말은 쓸 수가 없다. 줄여 말해도 늘여 말해도 어쨌든 비속어는 포함되지 않으면서 이 글이 다루는 이들 및 행태의 속성을 잘 반영하는 ‘깨시민’을 최종 선택하였으니 이해를 바란다.

진보적인 여성혐오자들은 노동해방을 외치며 여성혐오를 하고, 많이 배우신 여성혐오자들은 상아탑의 먹물을 내뿜으며 여성혐오를 하듯, 깨시민들은 자신의 깨어 있는 시민성을 발현하며 여성혐오를 자행한다. 어제오늘 일이 아닌 깨시민적 여성혐오를 새삼 문제 삼는 이유는 바로 이번 박유천 성폭력 사건을 두고 이 유형의 2차 가해가 가히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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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왼쪽: 오마이뉴스 2016.6.18.만평 <해우소> ⓒ계대욱. / 사진 오른쪽: 경향신문 관련 기사 페이스북 링크(2016.6.18.)에 달린 독자 댓글들.]

위 사진 자료들에 담긴 것은 헬조선의 온갖 중차대한 사회적 문제들을 일개 한류스타 연예인의 스캔들이 뒤덮어 우매한 대중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다는 발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깨어 있는 시민들은 그와 같은 우민화 전략에 속지 않고 진실을 바라볼 줄 안다는 우월의식이 저 일침들을 타고 넘쳐흐른다. 어째서 박유천의 성폭력 사건은 위의 사안들과 달리 일개 스캔들로 취급되는가? 여성 관련 문제는 하찮은 것이라는 여성혐오적 관점이 이들의 세계관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2002년 대선 기간에 발생한 개혁당 성폭력 사건을 둘러싼 당내 논란을 두고 당시 개혁당 집행위원 유시민은 “해일이 몰려오는데 조개나 줍고 있다”라는 발언을 하여 큰 논란을 빚은 바 있다. “개혁당 여성회의는 당이 아니라 여성들의 ‘권익’만을 중시하는 것 같다, 당이 먼저인지 여성이 먼저인지 모르겠다”라는 글을 뒤이어 당 게시판에 게재하여 쐐기를 땅땅 박은 이 발언은, 거대한 진보의 발걸음 속에서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들이 겪는 차별은 부차적인 것이라는 사고방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길이 남게 되었다.

계급해방이 이루어지면 여성해방은 자연스레 따라오니 큰일을 도모하는 자리에서 사소한 일로 설치지 말라 – 1980년대 운동사회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2016년 현재까지도 유구한 생명력을 자랑하는 이러한 윽박지름은 성차별이라는 것 자체만으로 이미 문제이지만, 사태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는 점에서도 문제가 된다.

 

성폭력은 섹스 문제다?

깨시민들이 깨어있고자 하는 것 자체는 사실 아주 정당한 행동이다. 전두환 정권기의 3S 정책을 비롯, 이 사회의 상층부에서 권력을 잡고 있는 자들의 비리를 덮기 위하여 연예인 스캔들을 이용하는 작태가 실제로 벌어져 왔으며 여전히 횡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문제에서 시민들의 눈을 돌려 우민화하려는 저질스러운 전략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언론의 자극적인 물량공세에 속지 않으려는 경각심이 필요하다. 소위 깨시민성이 유효한 것은 여기까지이다. 문제는, 박유천 성폭력 사건이 시민들의 눈을 가리는 ‘자극적인 연예계 섹스 스캔들’이냐의 여부이다.

많은 이들이 오해하고 있는 바와 달리 성폭력은 성욕을 주체하지 못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차이를 바탕으로 한 억압적 관계에서 발생한다. 평범한 남성이 끓어오르는 성욕을 참지 못해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일부 변태들이 동물적 욕구를 이성으로 제어하지 못해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보다 강하므로 너를 정복할 수 있을 때에 나의 권력을 확인하기 위해 저지르는 것이 성폭력이다.

이는 착취적인 고용주와 노동자 사이의 관계, 폭압적인 정권과 민중 사이의 관계, 법조계와 학계와 언론을 동원할 수 있는 거대 기업과 소비자 사이의 관계와 유사한 구도에서 발생하는 폭력이자, 피해자가 성적 약자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섹슈얼리티의 차원이 개입하는 폭력이다. 성폭력은 내밀하고 사적인 섹스 문제가 아니라 권력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폭력에 섹슈얼리티가 개입한 것이다. 깨시민 여러분이 그토록 해소하고 싶어하는 헬조선의 구조적 문제와 별개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박유천 성폭력 사건을 3S화하는 자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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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은 조선일보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박유천 성폭력 사건 기사를 링크하며 올라온 게시물을 캡처한 것이다(2016.6.18.). 박유천이 저지른 일련의 성폭력은 룸살롱 화장실에서 발생한 성폭력 사건을 피해자가 고소하면서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사건의 발생 장소 및 상황, 가해자와 피해자의 직업 등의 요소들은 자극적인 섹스 스캔들의 재료가 되기 쉬웠고,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 언론들 및 그들이 소유한 종편 채널들은 역시나 해당 사건을 포르노적으로 소비하고 있다. 왜 그러겠는가? 어떤 이익이 생기기에? 단지 클릭 수와 시청률을 위해서?

룸살롱은 기본적으로 접대의 공간이다. 을이 갑을 접대하기 위해 여성의 성적 서비스를 상납하는 곳이라는 것이 룸살롱의 핵심 속성이다. 룸살롱에 출입하는 남성들을 변호하는 단골 멘트가 무엇인가?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가는 곳이라는 변명이 아닌가? 이는 곧 한국의 ‘사회생활’이 여성의 성서비스를 동력으로 굴러간다는 자백이다.

권력과 섹스가 결탁하는 공간인 룸살롱의 문제를 심층적으로 파고들었을 때에 줄줄이 딸려 나오던 권력형 비리와 성폭력의 사례를 우리는 몇 년 전에 크게 목도한 바 있다. 바로 장자연 사건이다. 남성중심적인 권력이 작동하는 심층의 이면에서 성서비스가 상납의 재료가 되었을 때에 여성이 어떠한 위험에 처하게 되는가를 낱낱이 보여주었던 그 사건 말이다. 그 리스트에 보수 언론사들의 운영진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 역시, 우리는 아직까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만약 잊어버렸다면 다시 기억해내시라.

이번 사건을 섹스에 미친 한 연예인의 일탈적 행위로 축소시키고 자극적으로 희화화할 때에 무엇이 가려지는가는 자명하다. 가려지는 것은 옥시도, 세월호도, 전기 가스 민영화도 어버이연합도 법조 비리도 아니다. 가려지는 것은 성폭력을 용인하고 조장하는 한국 사회의 민낯일 뿐이다.

비단 박유천 성폭력 사건뿐만이 아니라, 언론은 그간 언제나 성폭력 사건을 선정적으로 소비해 왔다. 성폭력 사건을 보도하는 기사의 헤드라인이 에로영화 홍보문구를 방불케 하는 사례는 너무 많아 손꼽기도 힘들다. 성폭력 사건을 보도하는 것 자체가 3S가 아니라, 성폭력이라는 문제를 포르노그래피적으로 포장하여 팔아치우는 것이 3S이다. 그렇다면 3S에 속아 넘어가고 있는 자는 과연 누구인가? 성폭력 사건을 조명하고 문제 삼고자 하는 이들인가, 아니면 이 사건을 일개 연예인의 섹스 문제로 치부하여 여타의 사회적 사안들과 분리하려는 구도에 말려 들어가신, 깨어 있는 시민들인가?

 

‘해일’과 ‘조개’는 분리되지 않는다

여성혐오는 아주 잘 팔리는 상품이다. 월화수목금금금 노동자를 굴려대는 착취적 노동환경을 근본적으로 문제시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시민들의 눈을 가리기 위해서는 ‘생리휴가를 이기적으로 사용하는 몰염치한 여직원들’이라는 미끼를 던져주면 된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국적을 이유로 건장한 젊은 남성들을 2년씩이나 공짜나 다름없이 착취하는 징병제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지도 모르는 시민들의 싹을 자르기 위해서는 ‘군대도 안 가면서 권리만 주장하는 김치녀들’이라는 미끼를 던져주면 된다. 유권자들의 실질적인 정치적 성향 분포와 관계없이 보수정당에 유리하게 짜여 있는 현재의 선거 제도를 바탕부터 뜯어고치려 들 수도 있는 시민들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투표도 안 하고 놀러가는 여대생들’이라는 미끼를 던져주면 된다. 남성중심적 접대문화와 성폭력의 관계를 파헤치려 들지도 모르는 시민들의 판단력을 흐리기 위해서는 ‘가십거리에 지나지 않는 섹스 스캔들’이라는 미끼를 던져주면 된다. 해일과 조개를 분리하여 조개는 나중에 줍고 해일부터 해결하자는 깨시민적 사고방식은 과연 이 전략과 얼마나 멀리 있는가.

해일을 핑계 삼아 여성혐오를 정당화하지 말라. 해일이라는 것이 따로 있고 조개라는 것이 따로 있다는 구도 자체가 이미 거짓인데 어찌 그 둘의 경중을 가릴 수 있는가. 해일 앞에서 조개나 줍지 말라고 말하지 말라. 우리는 끝까지 깨어서 조개무덤을 세울 것이다.

 

글쓴이: 진흙
편집: 진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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