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와 함께 지하철을 기다렸다. 아마 만원 지하철인 것 같았다. 다음 지하철을 탈까 생각했지만 문이 열리자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하나의 흐름이 되어, 밀려, 밀려 지하철 속으로 들어갔다. 우리 둘 다 이번 열차를 타기 싫었다. 하지만 우리는 허우적거렸고 다른 승객들과 마찬가지로 내장 속의 음식마냥 섞였다. 우리는 한 공간에서 다른 곳을 향해 서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우물쭈물 앞으로 걸어가던 각자 모두의 걸음걸이, 불수의근 같이 그 의지 없는 의지를 떠올리곤 몸서리를 쳤다.

그렇게 그저 어물거리다 만원 지하철에 떠밀려 타듯 남들과 함께 성인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벌써 여러해 전 이야기다. 왜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 명확히 기억나진 않는다. 성인이 되어 나도 다른 성인들처럼 내가 갈 수 있는 우리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수많은 의문들은 ‘DON’T ASK, DON’T TELL(이하DADT)’ 에 부쳐졌다.‘ 왜 내가 널 미워해야 하지?’,‘왜 그에게 복종해야 하지? 그는 누구의 말을 듣지?’, ‘왜 나를 아프게 하는 상황에 감사해야하지?’ 사소하게 보였던 이 질문들은 사소하지 않았다. 결국엔‘내가 왜 여기에 있지?’라는 질문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개가  땅을 판 것 마냥 반발심들을 어설프게 묻어놓았다. 듣지 않고, 고백하지 않고, 보(이)지 않으면 가끔은 즐거웠다. 그 즐거움은 훈련이 잘 된 잔인한 사냥개에게 던져진 뼈다귀가 같은 것. 그렇게 시혜를 받으며 정상인 척 할 수 있었다. 화농성 여드름처럼 드러나는 것들은 재빨리 제거대상이 되었다. 얼른 짜내 고름이 있던 자리엔 흉터가 남았다. 흉터는 위장으로 감췄고 빨아야할 가치들에 고개 숙여 헌신했다. 가끔은 그 기준에 부응하지 못하는 내게 크게 실망하기도 했다. 그렇게 호모소셜(homosocial)한 우리 속에서의 날이 하루하루 저물었다.

노력하고 실망하는 동안 얻은 것은 적응이었다. 하지만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주변을 돌아보니 궁금증을 가진 어린 친구들이 존재했다. 그들은 자신이 왜 그곳에 있는지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맞기 싫었고, 도망가고 싶었고, 도움을 필요로 했다. 상황을 회피하는 인간이기 이전에 눈, 코, 귀, 혀, 피부로 자극을 알아차릴 수 있는 동물이기 때문에 그들을 감지 할 수 있었다. 느낄 수 있었기에‘그들이 그렇게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전혀 몰랐습니다.’ 라는 말로 변명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를 드러내면  책임감을 갖고 비정상이 되어야했다. 그래서 동정하고 침묵했다.

그 당시에도 페미니즘은 존재했다. 소리내기를 포기했던 나에게‘페미니즘’라는 단어는 바깥을 향해서는 공식적으로 ‘불순한 것’을 의미했고 스스로 안을 향해서는 ‘알 수 없지만 궁금한 것’들의 얽힘이었다. 의미들은 서로 뒤엉켰다. 하지만 따라야하는 규범과 기준들이 있었기에 떠오르는 질문들을 숨겼다. 그렇게 존재하지 않는 가치들에 집중하며 어영부영 퇴근길의 회사원처럼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지하철에서 내리듯 겨우 세월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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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다 페미니즘을 다시 만났다.

‘오늘부터 나는 페미니즘을 실천한다!’ 라고 다짐한 하나의 거창한 계기는 없었다. 페미니즘의 여신이 나타나 ‘지극히 높은 페미니즘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며 계시를 내려주는 일 또한 없었다. 페미니즘이 나에게 천천히 왔고 나도 페미니즘에게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주변을 돌아보니 혼자가 아니었다. 누군가는 방패를 들고 나왔고 누군가는 횃불을 들고 나왔으며 누군가는 지식을 나누어주고 또 다른 누군가는 넘어진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덕분에 외롭지도 무섭지도, 깜깜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결말은 ‘페미니즘 덕분에 공주님은 오래오래 살았습니다.’로 끝나지 않는다. 페미니즘이 만병통치약도, 아편도 되진 않았다. 오히려 애써 쳐다보지 않으려 했던 기존 세계의 취약성을 인정해야만 했다. 이는 생생한 고통을 수반했다. 내가 알던 세계는 내가 볼 수 없는 드라마의 무너진 세트장이었으며 여전히 무너지고 있었다. 폐허 속에서 다른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했다. 여기와 저기에 너무나 다양한 여성들의 다양한 삶들이 존재했다.

혼란함을 느꼈다. 페미니즘을 통해 다른 여성들의 경험에 나를 일치시켜 완전히 공감할 수 없었다. 페미니즘 덕분에 다른 여성의 삶을 완벽히 해석하고 적절한 의미를 부여한 다음에 나의 말로 멋지게 재현할 수 없었다. 진짜 페미니즘, 진짜 여성의 정체성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정의할 수 도 없었으니까. 심지어 이 글씨들을 글로 읽는 당신의 마음을 모두 파악하지도 못한다. 나는 당신과 같지 않다. 우린 다른 점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나는 절대로 당신을 완벽한 하나의 존재로 이해할 수 없다. 당신을 알 수 없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한다.  내가 마주치는 경험들을 멋지게 정의하려던 숱한 시도들은 모두 깨졌다. 하나 됨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이 겪은 부당한 일에 대고 ‘당신의 슬픔에 정말 공감합니다. 당신의 상황을 잘 이해 할 수 있으니까요.’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런 동의는 DADT, 상황을 회피하는 손쉬운 방법이기에.

 나에게 분명하게 구분 지을 수 있는 페미니즘의 정의는 없다. 무엇이 진짜 페미니즘인지 결정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페미니즘 덕분에 나의 관계들을 생각할 수 있었다. 나 한 사람만으로도 너-나, 나-우리, 너-우리, 사람-사람, 사람-사람이 아닌 것들, 이 이야기-저 이야기, 현재의 나-과거의 나-미래의 나처럼 수많은 관계들이 태어난다. 거기엔 겹쳐질 수 없는 무수한 차이들이 존재한다. 숨은 그림 찾기처럼 차이와 차이들 사이의 미싱링크를 찾아내는 작업이 중요하다는 뜻은 아니다. 다양한 맥락 속에서 유의미한 파열들이 계속 생기듯, 페미니즘도 끝없이 그 지층이 다양하게 겹쳐지고 어긋나 새로운 층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찾아내 구분하는 일보다 기쁨이 되는 일들은 따로 있었다. 페미니즘 덕분에 이렇게 글을 썼다는 사실은 내게 전혀 중요한 사건이 아니었다. 여성들을 하나로써 이해할 수 없었기에 그들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듣고, 그들의 글을 읽게 되었다는 경험이 중요한 유산이 되었다. 그들의 귀가 듣는 소리를 내가 다시 들었고 내가 낼 수 있는 소리가 말이 됨을 깨달아 기뻤다.

여성의 정체성 또한 무엇이 여성혐오인지 칼같이 정의내리는 것 이상으로 어렵다. 때문에 여성의 진짜 특징에 관한 리스트들은 기만적인 기획물이 된다. 즉 여성들이 이기적인 김치년이라서 살인사건이나 특정 이슈 때문에 길과 광장으로 나와 목소리를 내는 이유는 그들이 이기적인 된장녀-김치년의 본성을 가져서가 아니다. 서구의 진짜 페미니즘을 모르는 한국의 가짜 페미니스트들의 무지함 때문도 아니다. 특정 인터넷 커뮤니티 회원들이 내달리는 멧돼지처럼 포악해서도 아니다. 반대로 여성들이 생명을 존중하는 마음과 모성을 가졌기 때문도 아니며, 공감능력이 뛰어나서도 아니다.

그들은 현시대에 맞는 요구사항을 가졌기에 밖으로 나왔다. 그 요구사항들 중 하나는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지적호기심을 가진 이들이 현실참여를 할 수 있는 공간 말이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그 곳은 울타리를 친 닫힌 공간이 아닐 것이다. 그들이 만들어 낼 공간은 분명하게 자기주장을 할 수 있는 공적 공간이다. 그 속에서 너와 나의 다름은 제거해야할 대상이 아니다. 서로의 다름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공간이 될 것이다. 그러나 위험하고 낯설게만 들리는 그들의 목소리를 제한하려는 시도들은 끊임없이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절망하지 말자.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경험을 말하고, 쓰고 있다. 그들의 경험을 소리 내서 읽는 목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예전보다 그 목소리들이 많아졌음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그 목소리들은 기어코 듣는 귀를 만들어 내고야만다. 통제 속에서도 당신들의 목소리는 물리적인 장소를 가로지른다. 당신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바로 그곳이 공간이 된다.

여성은 하나의 여성이 될 수 없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생각은 착각 속에서만 자유로울 것이다. 진짜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누가 진짜 페미니스트인지 단언하지는 않겠다. 그 것에 대해서 정의 내릴 일은 아마 없으리라. 대신 목소리를 내겠다. 이번 열차는 타지 않겠다고. 이제 페미니즘을 만난 사람들은 은밀함과 침묵에 쌓여 침묵하고 묵인하기를 거부하고자한다. 그들은, 우리는 필요한 것을 한다. 이게 다 페미니즘 덕분이다.

 

글쓴이: 현전우일
편집: 진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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