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수많은 시간 동안 여성들을 그들만의 감정, 욕구나 욕망을 가진 ‘주체적인 인간’으로 여기기보다 내가 사랑을 주는 ‘대상’으로 보아 왔다. (역자주: 비슷한 의미의 신조어로는 ‘잠데상,’ 잠재적 데이트 상대라는 말이 있다.)

나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려는 건 아니지만, 아주 어려서부터 나는 여성을 ‘획득 가능한 상품’으로 보도록 교육받았다. 여성을 일종의 트로피처럼 여기는 사고방식은 이미 문화 전반에 퍼져있고, 미디어나 교육은 물론, 일상의 대화에서도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어느 하나의 젠더가 오로지 다른 이들의 만족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수백 수천만의 인구는 비인간화되고 만다. 또한 그렇게 ‘대상화된 사람들’에게 공감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이런 젠더 차별적 사고방식은 여성에 대한 (성적)대상화를 부추기는데, 왜냐하면 대체로 우리 사회에서 여성들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남자에게 주어지고 쟁취되는 ‘보상물’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 또한 여성의 삶에 대해 진중한 질문을 던지기 전까지, 수십 년간 내 자신이 여성들을 비인간화시키고 대상화 해 왔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나는 제일 먼저 나의 사고방식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 나는 내가 악질적이고 노골적인 성차별주의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스스로 만족스러워 했었지만, 실상 이 사회의 성차별주의는 너무나 만연해 있어서 나는 내가 편파적인 구조의 공모자였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 특히 남자들은 여성을 대상화하고 비인간화하는 문화를 영속시키는 데에 자신들이 기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을 확률이 높다. 

이번 지면에서는 일상생활에서 여성이 어떤 방식으로 대상화되며, 그리고 그것이 왜 위험한지를 살펴볼 것이다.

1. 미디어는 여성을 쟁취해야 할 대상이라고 가르친다.

내가 처음으로 여성을 대상화하는 방식에 눈을 뜬 건, 가족의 문제들(Family Matters)이라는 시트콤을 통해서였다. 이 프로그램에서 로라 윈슬로우 (Laura Winslow)는 스티브 우르켈(Steve Urkel)의 “연애 상대”역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연애 상대”라는 말은 상황을 축소시키는 감이 있다. 오히려 로라는 스티브의 연애 상대라기 보다 집착의 대상에 가까웠다. 로라의 삶에 자꾸만 끼어들려고 하는 스티브의 고집은 마치 귀엽고 엉뚱한 매력 포인트처럼 그려지지만 사실, 그것은 비인간화와 대상화를 수반하는 파괴적 행위일 뿐이다.

불행하게도, 내가 어렸을 때에는 절대 다수의 TV 프로그램들이 이런 식의 구조를 보여주었다. 남자는 여자에게 사랑을 느끼고, 극 중 여자의 기능이란 그저 남자의 연애 상대로써만 존재하는 것 말이다.

어린 아이였을 적부터, 나는 이런 방식으로 여성들을 바라보며 수십 년을 지내왔다. 나는 여성들이 그저 내 인생에 있어 드라마 소품 같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들만의 인격이나 생각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고, 그저 내 자아를 확장할 수 있는 부속품처럼, 미디어에서 배운 그대로 그렇게 봐 왔다. 내가 여성인 친구들에게 집적거렸을 때 그가 반응이 없으면, 나는 그들이 내 말을 못 들었거나 눈치가 없어서 내 관심을 못 알아챘기 때문이라고 확신했다. 당황스런 나의 흑역사를 말하자면, 그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더 심하게 들이댔었고 당연한 결과이지만 결국 몇몇 친구를 영영 잃기도 했다. 지금에서야 돌이켜보니, 그들이 나와의 관계를 끊은 건 너무나도 당연하고 잘 한 일이다.

이런 파국을 맞이한 데에는 분명 내가 낡은 TV 시트콤식 연애 관계를 보고 자란 영향도 일정 부분 있다. 남자는 여자에게 관심이랍시고 섹드립을 던지고, 이런 ‘농담’에 대해 대부분 여자들이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여자는 허공을 쳐다보거나 신경 쓰지 않는 체하다가, 그제야 고개를 들어 “뭐라고 하셨죠?”하는 뻔한 플롯. 남자가 “아, 아뇨, 아무 말도 안 했어요.”라고 대답하자마자, 시트콤 관객들의 웃음이 터져 나온다. 어린 시절의 나는 여성이 남자들의 이런 방식의 작업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다고 확신했다.

본질적으로, 여성은 남자의 필요와 요구를 투영할 수 있는 빈 그릇처럼 사용되었다.

이런 TV 프로그램이나 수많은 코미디 영화에서, 남자가 여자에게 무엇을 원하고 필요로 하는지 묻는 건 굉장히 드문 일이다. 아니, 심지어 나는 남자 캐릭터가 여자 캐릭터에 대해 이해하고자 하고, 인간성이나 자율성이 있는 존재로 보는 장면이 있기는 한지 잘 모르겠다.

여성이 이런 식으로 표현되면, 남자들은 여자들이 멍청해서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모를 거라고 인식하게 마련이고, 여성을 학대하거나 무시하고, 농담거리 정도로 취급해도 될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더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는 부분은, 여자들이 남자가 기대한 대로 반응하지 않을 때 남자들이 공격적으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 단지 ‘남자가 생각하기에 여자들이 행동해야 하는 방식대로’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는 하나의 젠더 자체를 통제하며 억압하는, 굉장히 위협적인 방식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존중 받고 공감 받아야 하며, 비인간화되거나 대상화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TV와 미디어에서 여성을 좀 더 긍정적으로 표현해낼 수 있어야 한다.

여성들은 그저 소품이나 극중 소모되는 텅 빈 장치가 아니라 좀 더 균형 잡힌 모습으로, 그들 모습 그대로, 그려져야 한다.

2. 어린이들은 학교에서 경직된 젠더 역할을 수행하도록 요구 받는다.

내 10대 시절, ‘춤’이 학교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어마어마했다.어떤 남자애가 어떤 여자애에게 춤추러 가자고 했는지와 관련하여 온갖 종류의 소문이 떠돌곤 했다. 이런 상황 역시 조금만 추정해보아도 먼저 행동하는 건 항상 남자애들이었고 여자애들은 그저 줄 선 구혼자들 중 하나를 고르는 역할만을 맡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공고한 젠더 역할은 이미 이때부터 시작되었고, 우리는 그저 충실히 우리에게 주어진 역할만을 수행했다.

우리 학교엔 여자애들이 남자애들에게 댄스파트너 신청을 하는 새디 호킨스 댄스 파티(Sadie Hawkins Dance Party)가 있었는데, 이건 오히려 젠더 역할 규범을 더 명백하게 만들었다. 얼핏 듣기에는 굉장히 좋은 취지였지만, 우리는 오히려 “여자애들이 남자애들에게 먼저 다가가는 건” 굉장히 특수하고 예외적인 상황이며 비정상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다른 댄스파티에서 여자애가 먼저 남자애에게 접근하거나 데이트 신청을 하면, 너무 들이대는 애, 또는 남자가 너무 고픈(?) 불쌍한 애로 간주되었다. 그러니 여자애들은 자신이 원하고 필요로 하는 것에 대해 침묵하게 되었고, 이런 사고방식이 쉽게 성인으로까지 이어지지 않았나 싶다.

내가 여성으로 전환수술(MTF)을 받기 몇 년 전,  젠더와 상관없이 온갖 친구들이 모두 몰려와서 나에게 여자애한테 데이트 신청 좀 하라고 채근하던 기억이 여러 번 있다. 무섭기도 하고, 누구 딱히 데이트하고 싶은 상대도 없다고 말하면, 그 애들은 나보고 “남자도 아니네!”라며 놀려대기 바빴고, “계집애처럼 굴지 마”라는 핀잔을 주기도 했다. 그들의 기준을 맞춰주기에 나는 충분히 적극적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고등학교에서 남자애들의 “데이트 신청”은 끊이지 않는데, 나는 이런 일들이 장기적으로 남자가 여자를 바라보는 시선에 문제를 가져온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자신의 필요와 요구에 있어 입을 열지 못하도록 강요 받은 여성상이 더해지면, 여성을 그저 재고 대상화하는 남자와, 그리고 그에 대해 아무런 대항도 할 수 없는 여자라는 최악의 조합이 탄생한다. 만약 여성들이 물건으로 취급 받는 현실에 문제를 제기하기라도 하면, 어떤 남자들은 분노를 주체하지 못한다. 감히 여자가 대드는 건 ‘여자의 올바른 몸가짐’이 아니니까!

이것이 바로 많은 남자들이 여자들의 거절에 부들거리는 이유다. 남자는 무조건 적극적이고 먼저 다가가야 하는 존재이기에, 거절은 곧 실패이며, 이는 곧 남성성에 대한 부정의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이들은 어려서부터 자신이 잘못된 생각을 주입 받았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므로, 전통적인 젠더 역할을 따르지 않는 여성들을 비난한다. ⁋사실, 젠더에 관해 이토록 해로운 고정관념을 강요하는 문화 그 자체가 결국에는 우리 모두를 망가뜨리고 있는 셈이다

3. 시스-헤테로 중심적인 언어는 사람들을 젠더 역할에 의해 규정되도록 만든다.

매일매일 우리가 만나는 시스-헤테로 중심적 언어들은 모든 사람이 시스젠더(신체성별과 성 정체성이 일치)이고 헤테로섹슈얼(이성애)이라고 전제해버린다. 이건 폭력적이고 배제적일 뿐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에게 씌워진 역할 규범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만든다. 우리가 젠더에 관해 논의할 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100% 남자거나 100% 여자, 둘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실상은 수십 개의 다양한 젠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남자 혹은 여자”라고 쉽게 말하곤 하는데, 이러한 언어습관은 우리의 젠더적 상상력을 제약한다.

우리는 아직도 “여러분(folks)”이라는 말 대신 “신사·숙녀분들(ladies and gentlemen)”이라는 표현을 쓴다. 누군가 임신한 모습을 보면, 으레 “딸인지 아들인지” 물어본다. 심지어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그들의 젠더는 미리 결정된다.

시스-헤테로 중심적 언어표현은 간성, 논바이너리, 에이젠더, 트랜스젠더를 비롯해 수많은 그룹의 존재를 배제시킨다.

젠더에 대해 성급하게 추측하는 것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이성애자일 것이라고 전제하는 경우도 너무나 일반적이다. 많은 부모들은 아이가 시스젠더일 것이라고 먼저 가정한 상태에서, 남자애는 여자애에게, 여자애는 남자애에게 관심이 있는지 물어보곤 한다. 이런 대화는 아이들의 머릿속에 이성애와 시스젠더가 “정상적”이고, 그 외의 존재들은 이상하고 비정상적인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준다.

이런 사고방식은 이미 우리 언어 속에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다.

특히 우리 아버지는 내가 어렸을 때 여성적으로 행동하면 불같이 화를 냈다. 내가 그의 “아들”이기 때문에, “게이” 같다는 이유에서 “계집애처럼” 행동하면 안 된다고 했다.

내가 여자에게 끌린다는 건 별로 아버지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내가 여성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기에 항상 “게이 같다”고 했으며, 여성성은 “태생적인 약점”같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에게 여성성이란 남자를 유혹하는 것, 오직 그뿐이었다. 나는 그의 “아들”이기에 앞으로 가부장이 되어야 하고, 이것만이 내게 주어진 역할이기에 나의 여성적인 행동은 “리더”가 갖추어야 할 모습에 배치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반대로, 나머지 가족들은 주변의 여자애들이 포부 있게 행동하거나 집안 살림을 위해 돈을 벌어오는 것을 손가락질하고 욕했다, 악바리 같은 여자들은 매력이 없다면서.

(가족들의 생각에) 여자들은 남편을 내조하고 소품처럼 집안에만 틀어박혀 헌신적인 가정주부가 되어야 하는 존재였다. 가족들이 구축해놓은 세계 속에서 나는 적절한 언어를 가지고 있지도 못했으며, 나의 존재를 설명하는 것과 내가 트렌스젠더 여성이라는 사실을 부모에게 털어놓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지금도 충분히 설명된 것 같지는 않다. 우리의 언어 자체가 배제적이고 젠더적 상상력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남자이지만 예뻐 보이고 싶은 애” 정도가 부모가 나의 존재를 이해하는 그나마 가장 나은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젠더적 상상력이 결핍된 건 비단 우리 가족 뿐만이 아니다. 내가 트렌스젠더 여성이라는 걸 사람들이 알게 되면, 그들은 자동적으로 내가 남자를 좋아할 거라고 지레짐작한다. 그리고 내 여자친구를 보면 마치 레즈비언을 처음 본 양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들이 보기에 나는 전형적인 여성성을 띄는 옷을 걸치고 있으니, 그것이 곧 남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 심지어 어떤 이들은 내 복장을 수작을 부려도 된다는 신호로 받아들이기까지 한다.

사실, 스탠드업 코미디에서 가장 흔히 발견되는 시스-헤테로 중심적 코드는 남자 진행자가 여성 관객들에게 “굳이 화장할 필요 없어요, 어차피 너랑 섹스할 거니까”와 같은 헛소리를 늘어놓는 경우다. 마치 여자가 하는 모든 행동이 남자의 관심을 끌기 위한 것인 양 착각하는 것이다. 그들 머릿속엔 여자들이 스스로를 위해 행동할 수도 있다는 옵션 자체가 없는 셈이다.

사람들을 지칭하는  제한된 표현 방식은 현존하는 이런 젠더 역할 규범들을 오히려 더 강화한다. 100% 남성과 100% 여성만 빼고 다른 모든 사람들은,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 자체를 박탈당한 채 부당함과 불편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우리는 사람들을 자동적으로 시스-헤테로로 가정하는 사고방식 자체를 탈피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주변화하지 않는 방향으로,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의 범주를 확장하고, 포괄적인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표현 방식을 넓혀가야 한다.

이렇게 언어생활을 조금만 바꿀 수 있다면, 사람들은 그들을 제약하던 이전의 언어가 부과하는 규범에서 벗어나 더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4. 남자들이 여성을 소유물로 여기는 것은 오히려 권장되고 있다.

첫 번째 섹션에서 다루었듯 남성이 여성을 얻기 위해 경쟁하는 TV속 구도는 흔히 발견되는데, 이런 남녀구도의 반복적 노출은 여성을 마치 획득할 수 있는 재산처럼 여겨지도록 조장할 수 있으며 이런 사고방식이 여성에게 실질적으로 미칠 수 있는 해악은 엄청나다.

사람을 “재산목록”으로 여기는 순간, 우리의 잠재의식은 어느새 상대를 ‘완전한 조건을 갖춘 인간’으로 간주하지 않게 된다.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면 상대에게 무엇이든 해도 된다고 느끼게 된다. 예를 들어, 휴대폰이 말썽을 부릴 때, 짜증이 나서 집어 던질 수도 있지 않은가.

여성을 획득 가능한 재산으로 보는 사고방식 역시 똑같은 위험성을 지닌다. “예상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여성은 상대방으로부터 폭력에 더 쉽게 노출되는데, 많은 사람들은 오히려 이런 여성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여성이 피해를 받았다고 하면 의심부터 하고 보는 대중들의 아우성은 쉽게 관찰된다. 많은 사람들의 사고 기저에, 여자가 여자답게 행동하지 않으면 그런 일을 당해도 싸다는 적개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남성에 의한 끔찍한 여성학대가 보도될 때면, 수많은 인터넷 댓글은 그녀가 마치 ‘말을 듣지 않는 가전제품’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심지어 여자가 부당한 처우에 맞서 싸우려는 시도라도 했다면, 댓글은 더욱 가차 없다. 이러한 비난은 곧 여자가 감히 온전한 인간처럼 행동했다는 뻔뻔함 때문에 남자가 입은 사회적 피해를 동정하는 데에까지 나아간다.

결과적으로 학대에 대한 사회적 시선은 남성중심적이고, 논의는 점차 남자를 화나고 당황하게 만든 여자의 행동을 비난하는 데에 집중되면서 여성에 대한 끔찍한 폭력은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되거나 무시된다.

이런 식의 흐름은 여성에 대한 공감의 결핍을 불러오고, 여성은 점차 드라마의 소품이나 물건, 누군가의 부속품처럼 간주된다.

이런 사고방식은 반드시 바뀌어야 한다. 여성이 공격 당하는 일이 발생하면 여성이 아니라 ‘사람’이 공격받았다는 사실을 주지해야 하며, 사람을 때리는 건 보편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행동이라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여성은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물건이 아니라 감정을 가진 사람이고, 그러므로 여성에 대한 폭력은 용인되어서는 안 된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우리는 사회의 안정과 질서를 유지한다는 명목 하에 고정관념과 역할 규범을 교육받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수십 년간 인류를 괴롭혀 온 악순환의 고리를 다시 체득하고 전수하는 셈이다. 영속되는 젠더 역할 규범이 우리에게 끼칠 수 있는 위험을 어린 아이들에게 잘 가르쳐주고, 사회가 이러한 사고방식을 강제하는 모든 미묘한 지점들을 짚어내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여성은 온전한 인간이고 다른 이들의 행복에 봉사하기 위한 존재가 아니라는 건 정말 명백한 이야기이지만, 분명 되풀이해서 공표될 필요가 있다. 여성에 대한 잘못된 편견은 변화해야 하고, 잘못된 사고방식이 가져올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는 것은 사회에 대한 우리의 책무이기도 하다.

※ 로빈 트랜(Robin Tran)은 에브리데이 페미니즘( Everyday Feminism)의 전담 작가이다. 그는 스탠드업 코미디언이자 블로거이고, UC 어바인 영어학을 전공했다. 2015년 초 트랜스젠더 여성임을 밝히고 그 뒤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Mad House Comedy Club(스탠드업 코미디 극장)에서 즉흥 코미디를 하기도 했고, Comedy Palace에서도 공연을 하기도 했다. 그녀의 기사는 xoJane와 Time.com서 출판되었다.

원제: 4 Ways Men Are Taught to Objectify Women From Birth @Everyday Feminism
원문 게재일: 2016년 6월 19일
최종 수정일: 2016년 6월 19일
원저자: 로빈 트랜(Robin Tran)
번역: 최성현
편집: 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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