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으로 소란한 틈을 타 집단 자위권을 용인하고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가는 수순을 밟고 있는 일본. ‘집단안전보장’과 같은 용어들이 등장하면서 ‘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고 느끼는 사람도 많지 않나요? 이렇게 사람들이 당황하고 있는 사이에 밀어붙일 작전이라면, 용서하기 어렵습니다.

비단 이 뿐만 아니라, 정치라는 것은 실제로 생활과 밀접한 것인데 뭐가 뭔지 잘 모르겠고, 멀게 느껴지기 쉽지 않나요? 그 이유 중 하나는, 정치에 관여하고 있는 사람들과 관계가 멀어 보이기 때문은 아닐까요? 국회와 국무 회의 등과 같이 정치에 관련된 뉴스가 나올 때마다 그곳에 있는 것은 중장년층의 남성들(정확히 말하면, 아저씨와 할아버지들이죠)입니다. 도쿄 도(都) 의회에서의 성희롱 발언이 문제가 되었을 때도, 발언 당사자와 그 발언을 듣고 웃으며 보고만 있던 주위의 의원들은 거의 남성이었습니다. 제가 지금 ‘정치가’는 ‘여성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이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일까요? 아뇨. 그런 게 아닙니다.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는 여성해방을 논한 현대의 고전으로 유명한 『제2의 성』(1949)에서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자로 만들어지는 것이다”라고 언명하고, 어떠한 과정을 통해 여성이 ‘만들어져’ 가는 지에 대해 논했습니다. 여러분들에게도 “여성은 리더십이 결여되어 있고, 권력 지향적이지 않기 때문에 ‘정치가’ 또는 관리직에는 적합하지 않아.”라는, 언뜻 그럴 듯해 보이는 이야기들이 낯설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어렸을 때부터 여자 아이는 상냥하고 고분고분하며, 언제나 다른 사람을 자기 자신 보다 우선시 하도록 길들여지고, 이것을 내면화해 왔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점이 여성이 정치가가 되기 어려운 요인 중 하나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죠. 

19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에 걸쳐 번성했던 여성해방운동(제2파 페미니즘 운동)을 이끈 여성들은, 보부아르의 이와 같은 생각을 ‘젠더(Gender)’라는 개념으로 표현했습니다. 타고난 성(Sex)이 ‘여자다움’과 ‘남자다움’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난 이후 사회환경과 문화 속에서 사람은 ‘-다움’을 주입 당해 간다는 것입니다. ‘모성본능’이라는 단어에 내재되어 있는 전형적인 믿음은, 임신과 출산이 가능한 신체를 갖고 있으면 누구나 엄마가 되고 싶어하고, 육아는 저절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얼마나 여성을 억압해 왔는지, 그 거짓말을 폭로한 것이 ‘젠더’라는 단어이었습니다.

현재 일본에서도 이러한 의미의 젠더는 일반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 상황입니다. 젠더에 속박되지 않는 삶이 가능한 사회를 만드는 일이 현재 진행형의 중요한 과제라는 점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의 포스트 모던 페미니즘 이론에서는, ‘젠더’에 조금 더 깊은 의미가 있다는 과감한 발상을 시도했습니다. 즉

젠더가 만들어진다는 점은 사실이라고 해도, 그와 같은 사고 방식의 배후에는 여남의 생물학적 성차가 ‘자연적’인 것으로서 존재한다는 암묵적 전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자명하다고 여겨지는 ‘자연적’인 성차, 즉 ‘섹스(sex)’란 대체 무엇인가?

와 같은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주디스 버틀러 (Judith Butler)는 “섹스(sex)는 이미, 항상 젠더(gender)”라고 설명합니다(1999, p.29). 육체적으로 부여된 것으로 보이는 성차 조차, 시대에 따라 다양한 ‘과학’적 지식의 이름 아래, 이분법적으로 여/남의 기호가 붙여져 온 것이며, 섹스 그 자체는 젠더화된 카테고리라고 말입니다.

이런 이야기들이 아마 많은 사람들에게 이상하다고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여자와 남자의 몸은 분명히 다른데? 여성에게는 질, 남성에게는 페니스가 있지 않은가? 호르몬 분비도, DNA도 다르잖아. 이건 어떤 문화·시대의 경우에도 다르지 않을 텐데 섹스가 젠더라니, 비합리도 유분수네”라고 말이죠.

하지만 버틀러는 그와 같은 신체적 차이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는 신체적 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다양합니다. 피부와 눈의 색, 인종, 성적 지향, 연령의 차이, 타고난 기질이나 성격, 체격도 제 각각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여/남의 신체적 차이가 거의 완전히 의미 없는 경우나 상황에서도 사람을 인식함에 있어 우선 ‘여/남’으로 구분 지어 생각하게 되죠. 그와 같은 인식의 상태가, ‘섹스 조차 젠더’라는 말의 의미인 것입니다.

사실, 여/남을 절대적으로 구분해서 생각하는 사고 방식은 근대 이후에 비롯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근대 이후에 “사람은 모두 평등”해졌기 때문입니다. 신분 차이가 절대적으로 여겨졌던 전근대 사회에서 사람들 간의 차이는 우선 신분을 기준으로 나뉘었습니다. 신분 내에서의 여남 간의 차이는 그 다음의 이야기이었고요. 즉 신분이 낮은 사람, 낮은 계층의 사람은 남성이라도 교육 기회나 자유를 가질 수 없었는가 하면, 신분이 높은 사람은 여성이라도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와 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던 것이죠. 그러던 것이 근대 이후 ‘평등’의 개념이 등장하면서부터는 여/남의 구분이 강조되었던 것입니다. 제국주의·식민지주의 시대에서는 ‘인종’이 사람을 나누는 ‘자연적’인 카테고리라는 사고가 흑인을 인간 이하 취급했던 노예제를 정당화했듯이, 근대 이후에는 여남을 다른 것으로서 사고하는 발상이 여성 차별을 정당화해온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여남평등’이라는 개념도 다른 의미에서 읽힙니다. 페미니즘은 발상 이래, 여남 간의 격차를 해소할 것과 ‘여남평등’ 실현을 목표로 투쟁해 왔습니다만, ‘여성’과 ‘남성’의 평등을 목표로 한다는 것은 애초 ‘여성’과 ‘남성’이라는 별개의 카테고리가 존재한다는 전제 위에 서게 되는 일이 아닐까요? 그 자체가 인간을 우선적으로 성(性)의 구분으로 인식한다는, 근대 이후에 만들어진 여성 차별을 정당화해 온 사고 방식인데도 말입니다. 에하라 유미코(江原由美子)가 “’여성’과 ‘남성’이라는 ’젠더화된 주체’가 최초에 있어서 그 양자 사이에 지배-피지배의 관계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과 ‘남성’으로 젠더화 되는 일 자체가 권력을 내포한다”(『젠더 질서』, 2001, p.25)라고 논한 바와 같이, 인간을 마치 ‘여성’과 ‘남성’이라는 두 종류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억압을 만들어 왔던 것입니다. 애초 ‘여성’과 ‘남성’은 대칭적인 존재도 아니고, ‘여성’이라는 카테고리로 한데 묶을 수 있는 ‘여성’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데도 말입니다.

이러면 마치 여남을 대등하게 하자는 페미니즘의 원점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닌지, 그것은 안티 페미니스트들이 바랐던 바가 아닌지, 라는 걱정을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괜찮아요. 그렇지 않습니다.

페미니스트들은(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여성도), 현실에 존재하는 다양한 여성 차별에 분노하고 항의할 때, 언제나 “그럼 여남 간의 성차가 없어지면 되는 것인가?”, “여남이 어떠한 대우를 받으면 평등한 것인가?”라고 반문 당하고, “차이냐? 평등이냐?”와 같은 양자 택일을 강요당해 왔습니다. 그리고 여성들 안에서 갈등이 생겨 나기도 했고요. 바로 이것이야말로, ‘덫’이었던 것 아닐까요? 이 덫을 알아차리고 ‘여성’과 ‘남성’의 젠더 카테고리를 탈구축하는 것으로써, 우리들은 새로운 미래를 구상할 수 있다는 것이 포스트 모던 페미니즘의 제언이었습니다.

여성은 다양합니다. ‘여성’이라는 카테고리로 한데 묶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한편, 현실적으로 우리들은 ‘여성’이라는 하나의 범주로 구분되어 명백하게도, 암묵적으로도 다양한 불이익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여성 차별에 반대하면서도 목표로 해야 하는 것은, 모든 여성들, 다양한 여성들의 자유와 존엄, 그리고 권리입니다. 그것은 결코 획일적인 것이 아닐뿐더러, ‘남성’과 같아지면(대등해지면) 된다느니, 그런 얄팍한 게 아닙니다.

이렇게 현대의 페미니즘 이론은, 젠더를 둘러싸고 새로운 지평을 열어 왔습니다. 뭔가, 자극적이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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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주디스 버틀러 (Judith Butler), 『젠더 트러블ㅡ페미니즘과 아이덴티티의 교란』, 이와나미서점(岩波書店), 1999년
(ジュディス・バトラー, 『ジェンダートラブル—フェミニズムとアイデンティティの攪乱』(竹村和子訳)岩波書店1999年)

여남 간의 해부학 상의 차이, 호르몬, 염색체의 성차 등, 자연스러운 사실인 듯 보이는 섹스(sex)가 실은 그것과는 별개의 정치적·사회적 이해에 기여하기 위해서 다양한 과학적 언설로 짜여진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간파한 자극적인 책입니다. 이 책에 따르면 젠더는 결코 부여된 속성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능동적으로 선택해서 구축해 나가는 행위(performativity)입니다.

버틀러는 몇 번 일본에도 온 적이 있고, 저도 만난 적이 있습니다만, 과거에 버틀러가 자신의 동성 애인을 처음으로 모친에게 소개했을 때, 모친이 상대가 동성이라는 점을 나무라기는커녕, “그래서, 그 사람은 유대인이냐?”라고 물었던 일화를 이야기해주었던 적이 있습니다. 유대인 차별이 심했던 시대를 살았던 모친에게 있어서는, 성별 구분 보다 유대인인지 아닌 지와 같은 구분이 더 중요하게 여겨졌던 것이죠.

원제: むちゃセンセーのフェミニズム<今さら>再入門 第4回  セックスはすでにつねにジェンダーである—「男女平等」の罠 @LOVEPEACECLUB
원문 게재일: 2014년6월 26일
원저자: 무타 가즈에(牟田和恵)
번역:  지은
편집: Mi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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