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온 거처

[전략 -이 글은 편집 과정에서 원문 중 중간부터를 발췌하였으며, 해당 앞부분은 아래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캐닝[Kathleen Canning]은 20세기 초 독일의 여성 방직 노동자들을 다룬 연구에서 임신의 경험이 작업 현장의 동지애를 위한 기초임을 설명했다. 비록 이 여성들은 자신들의 노조에 소극적으로만 참여했지만(이는 노조의 성차별주의도 한 몫 했다) 기습 파업을 자주 벌였다. 어떤 경우에는 감독관의 성희롱이나 강간에 항의하기 위해서였다. 캐닝은 “1902년과 1904년 사이에 여성이 DTAV 조합원의 17~23%를 차지했지만 소위 ‘공격적 파업’의 53%나 구성했다.”라고 했다. 1908년이 되자 “DTAV는 호프[Martha Hoppe]를 첫 여성 대표로 임명했으며 그 해에서 공식적으로 ‘여성 문제’를 제기했다.” 1

공장에서 일하는 독일 여성 노동자들이 사민당[SPD : Social Democratic Party]에 가입할 가능성이 높지 않았다는 점은 주목할 만 하다. 독일 사민당이 정치적 구성에 노조를 특권화했지만 실제 여성 당원들의 대다수는 공장이 아닌 집에서 가사 노동을 했으며 음식 가격의 인플레이션에 항의하는 집회를 통해 당에 가입했다. 2

연속적으로 휘몰아친 봉기, 분열과 패배로 독일공산당(KPD)이 창당하자 여성 활동가들은 새 정당의 남성 공장노동자 중심성을 비판하며 식량 폭동을 일으키고 소비 상품을 약탈했다. 1922년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여성 공부모임의 회원들은 가사노동이 비생산적이라는 의견에 실망하여 새로운 노동계급 요구안을 제안했다 : 협동조합 가정, 가사노동 하루 여덟 시간 제한,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 여성의 직업선택에 대한 자유, 그리고 성적 자유. 1928년에 방직노동조합은 임금노동과 가사노동의 관계를 규명하는 여성 논문대회를 후원하여 결과물을 출판했다. 3

독일공산당은 공장 내의 노동계급 단결을 불안정화 한 대공황이 들이 닥쳐서야 이 도전을 진지하게 다루었다. 이 시기는 임금 관계의 기초적인 특성이 실업이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공격적인 ‘프롤레타리아’ 정체성이 실제 회원 구성(대부분 공장이 아닌 길거리에서 조직되었으며 1930년이 되자 80%가 실업 상태에 놓여있었다)과 대립되자 독일공산당은 1930-32년 시기 성장하는 도중에 좋든 싫든 여성, 청년, 세입자, 복지 수령자 등 더 포괄적인 ‘비계급’ 투쟁들에 목소리를 내주게 되었다. 4

낙태와 피임을 둘러싼 동요도 이 일부로써 공산주의자, 사민주의자, 자유주의자 및 중립 좌파 의사, 사회복지사, 기타 활동가들 간의 놀라운 협조가 있었다. 독일공산당 – 또는 당이 후원한 개인 공산주의자 및 그들의 전문 조직, 연대, 포럼 등 – 은 낙태법 개혁을 위한 1931년도 운동과 1933년 이전까지 번창한 놀라운 섹스 상담 진료소들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다시 말해 사민주의의 가정, 즉 공장 남성 임노동자의 경험이 노동계급 형성의 역사를 환유적으로 대표하여 전략적 수준에서 헤게모니를 가진다는 추정은 계급 투쟁의 현실을 실질적으로 반영하지 못했다. 사민주의의 이론적 문제틀은 임금 노동에 대한 상상적 경험에 기반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실천에 요구되는 복잡한 정치적 계산들을 하지 못하게 됐다. 정세적 결정을 역사철학의 상수로 지정함으로써 결정의 전략적 및 역사적으로 특수한 고려사항들을 잊어버리게 되었다. 이제 전통이라는 유령으로 우리 주변을 맴돈다.

공장 바깥에서

물론 20세기 중에, 특히 마지막 40년 동안 많은 급진주의자들은 이 목적론을 비판해왔다. 1960년대와 1970년대의 페미니스트들은 남성 공장 노동자와 그의 열망이 계급 전체를 대표한다는 믿음에 근본적인 비판을 가했다. 공장의 임금노동에 대한 사회주의 운동의 근시안적인 고집은 애초에 운동이 가능토록 한 노동 영역을 은폐했다는 것이다. 임금 노동은 정의상 노동자가 생존을 위해 필요한 돈을 자신의 노동력과 교환하는 것이다. 그런데 페미니즘의 비판이 지적하듯이 임금 지불이 곧바로 배부르고 건강하며 충분한 휴식을 취한 노동자로 이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임노동자가 다음 날에 일터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서 상당한 양의 노동이 필요하다.

오직 노동만이 가치를 남성 노동자를 재생산하는데 필요한 사용가치로 변화시킬 수 있는데, 이 사용가치마저 그가 바로 또는 직접적으로 소비할 수 없다. 사용가치를 효과적으로 사용 가능한, 즉 소비되기 위한 사용가치로 바꾸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동이 필요하다. 5

페미니스트들은 자본주의 생산 양식 하에서 노동력을 다시 제공해주는 이 노동을 사회적 재생산이라고 불렀다. 이는 대개 눈에 보이지 않는 노동, 즉 요리, 청소, 돌봄, 교육 등으로서 임금노동이 생산을 할 수 있도록 한다. 페미니스트들이 옳게 지적했듯이 이 노동 없이는 그 누구도 자신의 노동력을 팔 수 없고, 임금이 교환될 수 없으며 잉여가치가 생산될 수 없다. 사회적 재생산은 일반적으로 가족 형태 내에서 이루어지고 역사적으로 여성들이 전담했으며 임노동자가 수행할 때도 있었지만 주로 지불되지 않은 노동이었다. 무엇보다, 특히 이탈리아의 몇몇 페미니스트는 사회적 재생산을 단순한 활동이 아니라 투쟁이 이루어지는 지형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비록 생산과 사회적 재생산이라는 두 종류의 활동이 항상 서로 결부 되어왔지만 사회적 재생산의 지형은 대개 무시되고 자연화되었으며, 격하되어 왔다. 노동 계급 형성에 대한 뛰어난 저서인 톰슨[E. P. Thomson]의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 6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톰슨도 대부분의 동시대 사회주의 이론가들과 마찬가지로 독립적인 자연화 된 가정 영역을 전제했다. 그는 일터의 분업이 역사적으로 형성되었지만 집 안의 분업은 자연적임을 암시했다.

‘진짜’ 착취가 가정이 아닌 일터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진짜’ 정치, 따라서 계급투쟁과 계급형성은 일터에서만 등장할 수 있었다. 항상 주어져있었다는 이유로 사회적 재생산의 지형을 역사 바깥에 둠으로써 톰슨은 이에 대해 침묵을 지켰다. 이 지형이 역사적으로 여성으로 젠더화되어 왔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여성을 역사에서 배제하고 서술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7 톰슨은 이를 통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19세기 사회주의 운동의 목적론적 서사를 공식적인 역사로 재생산하였다.

따라서 페미니스트의 비판은 다면적이어야 했다. 이론의 층위에서는 사회적 재생산, 무임금 노동 및 잉여가치 등의 개념을 탐구했다. 역사의 층위에서는 계급 형성 사관을 해체해야 했다. 예를 들어 스캇[Joan Scott]과 틸리[Louise Tilly]의 유명한 저서 『여성 노동 가족』에서 첫째 사회적 재생산은 역사를 가지기 때문에 정치의 장소라는 점, 둘째 생산과 사회적 재생산 형태는 항상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기 때문에 한 쪽의 변화가 다른 쪽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 셋째 가정이 사회적 재생산만을 수행한 장소였던 적이 없었으며 사회적 재생산과 생산 모두 일어나는 복잡한 장소라는 점을 논했다. 8 

동시대 실천의 층위에서 페미니스트들은 사회적 재생산의 지형에 연속적으로 투쟁을 조직하면서 공장이 계급 형성의 근본적인 장소라는 관념을 비판했다. 멀리 돌아볼 필요 없이 1970년대의 이탈리아를 예로 들면 낙태 합법화 투쟁,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 운동, 또는 ‘일방적 삭감’으로 불리우기도 하는 버스 요금·전기 요금·집세의 일방적 삭감을 요구한 광대한 운동이 있었다. 9 

여성들은 생활비를 둘러싼 운동을 주도했다. 중요하지만 자주 잊혀지는 사실은 1960년대 후반이 되자 한 때 공장을 특권화하던 남성 노동자들마저 투쟁을 바깥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1969년, ‘뜨거운 가을’로 불리우는 노동자 투쟁의 물결은 임금 인상, 더 나은 회사 복지, 그리고 공장 운영에 대한 발언권을 쟁취했다. 하지만 신속하고 치밀한 반응이 돌아왔다. 노조는 이 요구들을 정치적 자율성 안으로 흡수하여 더 민주적이지만 결국 포섭된 평의회 체계를 만들었고 자본가들은 전반적인 생활 비용, 집세, 식비, 그리고 기초 서비스의 가격을 올려 높아진 임금을 간단하게 무효화했다.

포르토 마르게라[Porto Marghera]의 화학 공장에서 일한 노동자 스브로지오[Italo Sbrogio]는 훗날에 이 책략들이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이 때문에 우리는 이를 악물고 공장 내의 개입을 바깥으로, 즉 ‘사회적인 것[the social]’으로 끌고 나가서 높아진 생활 비용에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공장의 투쟁들은 전략적 곤경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지형에서도 투쟁을 전개하여 이를 돌파해야 했다. 이것이 ‘일방적 삭감’ 운동의 근본적인 전략적 고려사항 중 하나였다. 기억해야 할 사실은 운동이 공장 주변의 프롤레타리아 지역에서 시작했다는 점이다.

스르보지오는 어떻게 오래 지나지 않아 운동이 다른 지역으로 확대됐는지 회고했다 : “사람들은 집세를 낮추고 빈 집을 점거하며 식재료에 값을 덜 지불했다. 우리는 마을 곳곳에 지역 위원회를 세워 이를 조직했다. 심지어 성공적인 불매운동을 조직해서 몇몇 슈퍼마켓들이 기본 식재료 가격을 인하하도록 한 경우도 있었다.” 한 대규모 ‘일방적 삭감’ 집회에서 활동가들은 “줄인 가스·전기 비용 청구서들을 태워 만든 큰 불을 지펴 집회가 정점에 이르렀다. 4개월 간 전국적인 시위가 벌어지자 정부는 노조와 협상을 맺어 전기 가격을 인하했다. 위원회 관련자들은 이처럼 공장과 지역이 끈끈한 관계였던 적이 없다고 했다.” 10 

어떤 경우에는 사회적 재생산을 둘러싼 투쟁이 집합 생활 방식에 대한 실험과 보육 시설·공동 주방·대중의료시설 만들기로 이어지기도 했다. 11 자본주의에 고유한 사회 관계들을 재생산하지 않는다고 여겨졌던 이런 대안적 삶의 양식에 대한 실험들은 확대된 투쟁의 전선에 기반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반문화[counterculture]로 머물지 않을 수 있었다. 물론 생산의 특권화를 넘어서려는 선택에 대한 토론도 상당히 이루어졌으며 많은 공장 노동자들은 자신의 투쟁이 후순위로 밀리는 것에 격렬하게 반대했다. 이는 결국 운동의 중요한 모순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투쟁이 최고조로 오르고 전략이 모든 것을 결정하게 되자 공장을 특권화 하던 입장은 해체되고 다른 계급 형성의 경로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치적 의제

오늘날 달라진 정치 및 계급 지형의 한복판에서 전략은 율법에 대한 충실성보다 우선되어야 한다. 여전히 사회적 재생산의 활동에는 강력한 계급 적대가 작동하고 있다. 재생산 지형에 대한 자본의 공격이 긴축의 형태를 띄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는 노동자에게 사회적 재생산 비용을 전가하는 것이다) 노동계급의 시간을 쥐어 짜는 것은 재생산 노동의 상품화 및 시장화의 확대로 이어졌다.

오늘날 많은 정치 대결 전선들은 사회적 재생산 지형을 관통한다. 급상승하는 집세, 무너져 가는 건물, 재원 부족에 시달리는 학교, 높은 식재료 가격, 허리를 휘게하는 빚, 경찰 폭력, 그리고 물·교통·의료와 같은 기초 사회 서비스에 대한 접급성의 부족이 있다. 가장 극적인 대중 투쟁 – 예를 들어 반(反)인종주의, 반경찰폭력, 반긴축 등 – 이 거리에서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은 놀랍지 않다. 실업률이 13% 넘는 퍼거슨[Ferguson]에서는 사회 운동이 공장이 아닌 거리에서 촉발되었다. 한 때 미국 공장 투쟁들의 심장부였던 디트로이트[Detroit]는 이제 물에 대한 기본권을 위해 싸우고 있다.

이는 사회적 재생산이 경제적 필요라는 초역사적 분류에 들어가여 생산과 나란히 인류학적 원칙이 된다는 것을 의미 하지 않는다. 대신에 데닝[Michael Denning]의 말처럼 “일하자는 제안이 아니라 생계를 꾸리라는 지시로” 시작하는 자본주의적 사회 관계의 특수성을 겨냥해야 한다. 12 사회적 재생산의 관점을 택하면 우리의 기본적인 상태가 임금이 지불되는 직장이 아닌, 존재론적 무임금으로 정의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회적 재생산의 지형에서는 실업이 고용을, 비공식 부문이 공식을 선행하며 프롤레타리아는 임노동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사회적 재생산 수준의 투쟁들은 패스트푸드 산업, 농업, 병원, 대학, 물류업 등의 노동자들과 연대하여 통일된 분석 및 적대 지형에 대한 필요성을 증명하고 있다. 오늘날 정치적 의제는 어떻게 새로운 계급 권력을 만드는 긴 과정이 시작될 수 있도록 다양한 지형에 있는 복수의 투쟁을 효과적이고 유기적인 통합을 할 것인가이다. 이로써 우리는 또다시 정치 조직화의 문제로 돌아간다.

글쓴이 소개: 아사드 하이더는 뷰포인트의 편집자으로서 UC 산타 크루즈의 대학원생이자 UAW 2865의 활동가이다. 살라 모한데시는 뷰포인트의 편집자이자, 펜실베니아 대학교의 역사 전공 박사과정생이다.

 


원제: Making a Living
기사 출처: https://viewpointmag.com/2015/10/28/making-a-living/
원문 게재일: 2015년 10월 28일
원저자: Asad Haider, Salar Mohandesi
번역:  보리
편집: 진달래

 

숨겨온 거처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푸리에[Charles Fourier] 같은 초기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 대중의 일상적 투쟁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들에게 사회주의는 치밀한 생각을 통해 발견하여 유복한 후원자를 통해 실현될 일이었다. 푸리에는 매일매일 자신의 사회주의 미래에 투자할 자선가를 기다렸다. 그는 나폴레옹에게까지 “인류를 사회 혼란으로부터” 구해달라고 했다. 13

노동자 대중이 독립적으로 투쟁하기 시작한 1830년대 및 1840년대가 되어서야 블랑키[Aguste Blanqui], 마르크스[Karl Marx] 등의 혁명가들이 사회주의는 지식인의 정교한 계획이 아니라 노동자의 투쟁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는 주장을 일관적으로 펼치기 시작했다. 결국 이 아이디어는 자리잡았다. 대량 이주, 산업화의 확산, 그리고 많은 국가들이 헌법 제정, 시민법 개정, 국회 설립 등의 극적인 사회정치적 개편을 한 1860 및 70년대 이후, 사회주의 운동 전체는 ‘노동 계급’의 투쟁에 닻을 내렸다. 14사회주의는 이 때부터 노동 계급을 하나의 일관된 정치 주체로 형성하는 것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물론 누가 정확히 이 계급에 속하는지는 애매했다. 수많은 범주로 노동자들을 분류할 수 있었고 여전히 노동자 삶은 서로 이질적이었으며, 노예제, 임금 노동, 소작 노동 등 제각기의 생산 형태들이 서로 뒤섞였다. 무엇보다 대다수의 노동자는 고정된 정체성을 가지지 않았다. 정처 없이 떠돌다 가을이 되면 농민처럼 땅을 경작하며 겨울에 실업에 빠졌다가 운이 좋으면 봄에 공장 일자리를 찾았다. 그렇기에 노동 계급은 단일한 집단이라기보다 전통, 종교, 문화, 직종, 인종, 젠더, 그리고 국적에 따라 나뉘어지는 무질서한 다중에 가까웠다.

규정의 곤란함은 전략적 딜레마로 이어졌다. 이질적인 다중이 어떻게 자신을 단일 주체로 구성할 것인가? 15세기 후반에 사민주의는 이 문제를 복잡하게 얽힌 실천과 이론적 제언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이제는 친숙한 사민주의의 이론적 문제틀은 세 가지 원칙이 뒷받쳐 주고 있다:

먼저, 노동자 다중의 일부는 환유적으로 나머지를 대표한다. 그 당시 프로파간다의 대부분이 증명해주듯이, 공장의 남성 임노동자가 노동자 계급의 얼굴이 되었고 이들의 투쟁은 가장 가시적이 되었다.

두 번째로, 이 특정 분파의 이해관계는 다른 모든 이들에 대해 우선권을 가진다. 소수 민족, 여성, 피식민지 대중 각각이 가지는 인종 평등, 해방, 민족 자결주의에 대한 열망은 공장 노동자들이 만든 혁명에 종속됨으로써 실현될 것이었다.

세 번째로, 사회주의자는 공장 노동자들이 일하는 장소를 계급 형성의 근본적 지형으로 특권화하였다. 공장은 가장 열렬한 전투들이 싸워지는 장소이자 노동 계급 전체가 세계 역사에 진입하는 장소였다. 륄레[Otto Rühle] 같은 이는 이 같은 공장주의 논리를 극단으로 끌고 가, “공장 안에서만 오늘날의 노동자가 진짜 프롤레타리아가 된다… 공장 바깥에서 그는 프티 브루주아로서, 프티 브루주아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프티 브루주아 환경과 중산층 버릇들에 참여한다.”라고 주장했다. 16

서로 암시하는 이 세가지 지향은 – 결과를 어떻게 평가든지 간에 – 애초에 전략적으로 유도되었다. 공장 산업 노동자들의 투쟁이 근본적으로 보인 이유는 이 곳에서 노동자 계급이 가장 강력하고 자본가들이 잠재적으로 약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또 이윤의 근원일 뿐만 아니라 전례 없는 숫자의 노동자들이 모이기도 한 곳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자본은 결정적인 위치에 수많은 노동자들을 집중시켜 스스로 파멸로 이끌 조건들을 만들었다. 당시 널리 읽힌 카우츠키가 설명했듯이, 근대 생산의 모든 조건은 노동계급의 연대를 늘려주는 경향이 있다.

중세 시대의 장인은 각자 완성된 제품을 생산했다. 즉, 산업적으로 거의 독립적이었다. 오늘날 완성된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 수십 명 또는 수백 명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산업은 협력을 가르친다. 17

서로의 곁에서 일하고 생산 과정에서 협력하며, 공동의 상황을 경험하고 무엇보다 동일한 착취를 공유하며, 공장의 임노동자들은 자신들 간의 차이들을 이겨내어 통합된 힘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은, 공장이라는 혹독한 단련장 안에서 노동 계급이 정치술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가정했다. 18

이 수(手)는 본래 전략적인 선택이었으나 역사에 대한 목적론적 해석을 통해 정당화되었다. 서사는 산업화가 어느 정도 산업 임노동자로 이루어진 동질한 계급을 만들 것이라고 했다. 카우츠키는 이어서 “기계의 영향 아래 직종 간의 구분이 재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19 곧 투쟁하는 대중의 대부분이 산업 프롤레타리아가 될 것이었기 때문에 이 세 가지 수(手)가 암시하는 대행주의[substitutionism]는 임시적이었다.

우리는 이미 산업 프롤레타리아가 유일한 노동 계급이 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보았다. 또한 다른 노동 계급도 점점 노동의 조건과 삶의 방식에서 프롤레타리아와 유사해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리고 노동 계급들 중에서 프롤레타리아만이 에너지, 지성, 그리고 목적 의식이 확장되고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 산업 프롤레타리아는 다른 노동 계급 집단들이 사라지며 조직되는 중심이 되었다. 그들이 느끼고 생각하는 방식은 비자본가들(어떤 지위이든지 간에)의 표준이 되었다. 20

이 이론의 그 모든 모순, 배제, 위계 등에도 불구하고 사민주의의 정치적 실천은 상당히 성공적이었다. 19세기와 특히 20세기에 걸쳐 대다수 나라의 수십만명의 노동자들에게 계급은 현실성 있게 다가왔다. 노조, 위원회, 그리고 특히 대중 정당을 통해 조직된 역사적 노동 계급은 일련의 굉장한 승리를 거머쥐었을 뿐만 아니라 투쟁 사이에 주체적 연속성도 보존하는데 성공했다. 요약하자면 계급은 일상 생활 속으로 녹아들었다.

그러나 사민주의의 성공이 사민주의의 자기 서사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으로 이어지면 안 된다. 임노동의 이질성은 공장 안에서도 명백했으며 목적론이 예측한 방식대로만 노동자들이 계급으로 조직되지도 않았다.

Notes:

  1. Kathleen Canning, 「Gender and the Politics of Class Formation: Rethinking German Labor History」, The American Historical Review 97, no. 3 (June 1992): 763n, 761. 캐닝은 DTAV의 젠더 구성을 포착한다: “DTAV의 첫 대회가 열린 몇 년 뒤인 1897년도에는 2400여 명의 여성이 회원 수의 11%만을 차지했다. 다음 십 년 이내 DTAV는 방직 노동 분야에 비교 될 정도로 여성화가 많이 진행되어 1907년이 되자 DTAV의 조합원의 37%이 여성이었다. 세계1차대전 전까지 노조가 성장하는 와중에도 여성 회원 수 비율은 상대적으로 일정하게 유지되었다(그래프  참고). 1913년과 1919년 사이, 전쟁 중에 여성이 노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자 여성 회원 수는 세 배 이상 뛰었다. DTAV 회원 여성이 50만여 명인 1919년과 1923년 사이에 비율은 또다시 가파르게 증가했다… 1925년이 되자 여성 방직 노동자의 조직율은 남성을 넘어섰다: 여성 방직노동자의 30%, 남성의 24.5%이 DTAV에 소속되어있었다. 더 나아가 여성 방직노동자는 남성과 같은 수로 파업에 참가했다. 1919년과 1924년 사이에는 이마저 초월했다.”, 759-60.
  2. Richard J. Evans, 「Politics and the Family: Social Democracy and the Working-Class Family in Theory and Practice Before 1914」, 『The German Family: Essays on the Social History of The Family in Nineteenth and Twentieth-Century Germany』, Richard J. Evans, W. R. Lee 편집 (London: C. Helm, 1981).
  3. Geoff Eley, Forging Democracy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2), 191; Canning, Gender, 766.
  4. Ibid., 257.
  5. Leopoldina Fortunati, 『The Arcane of Reproduction: Housework, Prostitution, Labor, and Capital』 (New York: Autonomedia, 1995), 49.
  6. E. P. Thompson, 『The Making of the English Working Class』 (New York: Vintage Books, 1966)(나종일 등역,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 분석 범주로써 ‘경험’과 ‘언어’의 이율배반은 – 대륙이론의 현상학과 구조주의의 결정적인 거울 쌍 대립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 계급 구성의 방법론이 넘어서고자 했던 것이다. 이 이론적-역사적 시점에 관해서는 Warren Montag, 『Althusser and His Contemporaries: Philosophy’s Perpetual War』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2013)(최원, 『알튀세르와 그의 동시대인들』, 근간), 그리고  Knox Peden, 『Spinoza Contra Phenomenology: French Rationalism from Cavaillès to Deleuze』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2014)를 참고하라.
  7. 책 전반의 젠더 가정에 대한 강력한 비판은 Joan Scott, Women in the Making of the Working Class」, Gender and the Politics of History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88)를 참고하라.
  8.  Joan Scott and Louise Tilly, 『Women, Work, and Family』 (New York: Holt, Rinehart and Winston, 1978)(김영, 박기남 등역, 『여성 노동 가족』).
  9. Bruno Ramirez, 「The Working Class Struggle Against the Crisis: Self-Reduction of Prices in Italy」, 이는 『Zerowork 1』, (December 1975): 143-150. Radical America 10 no. 4 (July-August 1976): 27-34에 재수록 됨.
  10.  이탈로 스보로지오, 마르게라 이탈리아 06년도 6월 9일 강연 “포르토 마르게라 노동자 위원회의 역사”, 『포르토 마르게라 : 마지막 선동자』, 39-40에 재수록.
  11.  Patrick Cuninghame, 「Mapping the Terrain of Struggle: Autonomous Movements in 1970s Italy」, 이번 호.
  12. Michael Denning, 『Wageless Life』, New Left Review 66 (November-December 2010): 80.
  13. Charles Fourier, 「Letter to the High Judge」, 『The Utopian Vision of Charles Fourier: Selected Texts on Work, Love, and Passionate Attraction』, Jonathan Beecher 번역/편집/소개했다, 『The Visionary and His World』 (Boston: Beacon Press, 1971)도 참고.
  14. Charles S. Maier, 「Consigning the Twentieth Century to History: Alternative Narratives for the Modern Era」, The American Historical Review 105, no. 3 (June 2000): 807-31.
  15. Salar Mohandesi, 「Class Consciousness or Class Composition?」, Science and Society 77, no. 1 (January 2013): 72-97. 19
  16. Otto Rühle, 『From the Bourgeois Revolution to the Proletarian Revolution』, 1924.
  17. Karl Kautsky, 『The Class Struggle』, 1888, Chapter 5, Section 5.
  18. 학교라는 이미지는 사민주의가 공장을 이해한 방식에 대해서 라스 리의 규정을 따랐다. 『Lenin Rediscovered: 『What is to Be Done?』 in Context』 (Leiden: Brill, 2006), 523. Daniel Lindenberg, 『L’Internationale communiste et l’école de classe』 (Paris: Maspero, 1971)도 참고.
  19. Kautsky, Class Struggle, Chapter 5, Section 5.
  20. Ibid., Chapter 5, Section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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