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아주 오래간만에 본 친구가 있었습니다. 수감된지 얼마 되지 않아 잠깐 같은 방을 썼던 사람입니다. 제 기억에는 저보다 10살 가량 나이가 어렸습니다. 그 당시 둘 다 수감된지 얼마 되지 않아 주변에 당하고 지내면서도 서로 의지하며 잘 지내곤 했습니다. 체구도 마르고 차분하고 조용한 친구라, 험난한 감옥 생활을 잘 견딜 수 있을까 걱정이 됐었습니다.

헤어지고 소식을 듣지 못하다가, 최근에 우연히 마주쳤습니다. 얼굴은 그대로였지만 보이는 모습이나 분위기는 매우 거칠어져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는 이곳에서도 일이 많고 거칠고 위계질서가 강하기로 소문난 취사장으로 가게 됐던 모양입니다. 전보다 한껏 목소리도 커지고 말도 많아졌습니다. 욕설도 한마디 하지 않던 사람이 부쩍 욕설이 늘었습니다. 오랜만이라 서로 사는 얘기를 듣게 됐습니다. 취사장에서 처음에 나이도 어리고 순해보여서 사람들이 만만히 봐 이래저래 궂은일을 시키고 갖은 짜증과 화풀이의 대상이 됐었다고 합니다. 바깥에서 돌봐주는 가족도 마땅치 않아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었던 모양입니다.

취사장은 일이 힘들어 나이 젊은 사람을 많이 뽑아가는 편인데, 개중에 자기 또래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친구는 자기와 다르게 당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을 이기기까지 하더랍니다. 그래서 그 친구처럼 세보이려고 노력하다보니 사람들이 자기를 건드리지 않는다고 자랑을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자리를 잡아, 취사장에서 힘 좀 쓰는 형님들과 어울려 지내며, 어려운 일은 다른 사람 시키며 자기는 일을 덜 하는 입장이 되었다고 합니다. 남는 시간은 먹고 운동을 하며 체력을 키우고 있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자기에게는 문신이 없는 것을 무척 아쉬워했습니다. 요즘은 자기보다 나이 많은 취사장 신입들들 다그치고 괴롭히는 재미로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전에는 불안해하고 눈치를 많이 보는 모습이었는데, 이제는 자신감 넘치고 기세등등한 모습이었습니다. 자신감은 보기 좋았으나, 그 자신감은 자신의 폭력성을 과시하여 얻은 것이었습니다.

누구를 위한 폭력인가

제가 겪은 일 그리고 오랜만에 만난 그가 겪은 일들은 감옥에서 그리 특별한 경험은 아닙니다. 이런 폭력에 대한 경험은 대부분의 수감자들이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경험은 자연스레 서로에 대한 경계와 혐오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리고 살아남기 위한 폭력성의 과시는 사람들의 마음 속 삶의 기준이 되어버렸습니다. 불필요한 과한 소비를 하면서 감옥에서 자신의 돈을 자랑하려고 노력하거나, 자신의 폭력성을 과시하는 모습은 감옥의 공기를 한층 더 차갑게 만듭니다.

이곳에서는 자신을 과시하는 행동과 말은 넘쳐나지만, 미안하다는 말과 고맙다는 말 같은 것은 웬만해서는 듣기 어렵습니다. 자신이 잘못을 하고 그것을 인정해버리면 상대방에게 진다는 생각입니다. 그것을 트집 잡아 무엇인가 요구하거나 괴롭히지 않을까 합니다. 별 의도 없는 호의라 하더라도 사람들은 의심을 가지고 긴장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입니다. 함부로 호의를 받기도, 주기도 힘들어지는 문화. 몸뚱아리로만 사는 징역이라 서로 위악을 부려 몸이라도 지키려고 하는 것이 이해는 갑니다만, 저는 관계에서 먼저 총을 내리고 접근하는 편인데 이게 사람들에게는 ‘호구’로 보이거나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의심을 받는 것 같아서 슬프기도 합니다. 최소한의 일상생활에서조차 이런 경계와 긴장감을 가지고 살아야하니, 삶이 늘 고단합니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란 바로 이런 마음들이 아닐까 합니다.

물론 이런 모습이 감옥만의 특별한 풍경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에서도 익숙하게 벌어지는 일들입니다. 타인에 대한 경계와 혐오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남을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는 힘과 폭력성을 과시하는 것을 살아남기 위한 부득이한 것으로 합리화 되고 있습니다. 아니 요즘은 적극 권장되고 있는 모양입니다. 국가 간의 외교적 갈등과 군비경쟁, 학교·직장· 사회 어디에서든 사람들을 다루고 통제하려는 일, 여성·장애인·성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차별과 폭력은 안타깝지만 반드시 필요할 일이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이 세계에서는 그것을 ‘진정한 남자’라면 갖춰야할 ‘남자다움’이라고 부르며, 사회에서 우위에 서기 위해 필요한 리더십의 기준으로 삼습니다. 타인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남성성’이야말로 타인에 대한 혐오와 공포에 대응하는 유일한 방식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폭력적인 관계맺기가 권장되는 세계에서 인간의 연대, 평화의 가치라는 것은 허무맹랑한 소리가 되어버리지 않나 싶습니다.

평화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2년 전 제 자신의 병역거부를 세상에 알리고자 했을 때, 당장 평화로운 세계가 다가올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일년 남짓 살아온 지금, 평화는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더라도, 이대로 우리의 꿈을 허무맹랑한 소리로 내버려둘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일단 삶의 기준이 되어버린 ‘남성성’의 가치를 끄집어낼 필요가 있습니다. 폭력과 지배를 통한 관계맺기 방식이 타인에 대한 혐오와 경계를 어떻게 증폭시키고 있는지, 타인을 보는 시선을 어떻게 일그러뜨리고 있는지 따져보아야 합니다. 1년 간 지내면서 폭력과 혐오의 감정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퍼져나가는 과정을 보았고, 그 속에서 제 자신도 자유롭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동안 저는 ‘평화’라는 단어를 너무 쉽게 써왔던 게 아닌지 반성을 해봅니다.

남성들의 관계맺기 방식은 국가 간의 외교적 관계, 평화 문제에 대한 논의와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군축을 반대하며 ‘힘 없는 평화는 없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설득력을 가지듯이, 가부장제의 남성성도 비슷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서로 겨눈 총을 절대 내려놓지 않으며, 그 이유를 상대방 탓 하는 것도, 남성성이 가지는 폭력과도 유사한 것 같습니다. 관계의 문제가 자신에게 있다는 걸 잘 상상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명색이 병역거부자이기에, 평화에 대한 담론이나, 논의를 나름 꾸준하게 고민해나가면서 우리 사회의 가부장제가 정말 뿌리 깊이, 무의식적·역사적으로 곳곳에 존재하고, 그리고 영향을 주게 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지 설득의 방법에 대한 이야기가 새삼 제게 무겁게 다가옵니다. ‘낙오’에 대한 은연중의 공포가 서로를 겨눈 마초성이라는 총을 내려놓게 하는 걸 어렵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상대방의 무기의 존재를 그 이유로 삼지요. 난 이러지 않으려고 하는데, 저 자 때문에 그런 거라고 핑계를 대는 거지요.

제 생각에 평화주의이든 여성주의이든 답은 비슷한 것 같습니다. 악순환을 뿌리 뽑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총을 내려야 합니다. 총을 맞는 한이 있더라도, 그게 제가 될 것이고 우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폭력적인 남성성을 꺾어 내려면, 그것을 버리는 사람들이 생겨야 하고, 누군가 해야 한다면, 먼저 내가 하고. 아직은 그 정도 자기 선언 밖에는 못하겠지만, 남은 수감 기간 동안, 그리고 밖에 나가서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좀 더 고민하고 실제로 할 수 있는 것들을 시도해보며 지내겠습니다. 다음에는 좀 더 나은 이야기로 여러분과 함께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자유와 평화, 사랑의 마음이 여러분과 함께하길 기원합니다.

2016년 가을 박유호가 씁니다.


글쓴이 박유호님은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를 이유로 여주교도소에서 복역 후 출소했습니다. 이 글을 통해 노동당 여성위원회가 페미니즘에 대해 고민하는 남성 당원들과 함께 시작한 ‘남성성들: 남성 페미니스트 글쓰기 연재’에 참여합니다. ‘남성성들: 남성 페미니스트 글쓰기 연재’는 페미니즘에 대해 고민하는 남성 노동당원들이, 노동당 여성위원회와 시작한 글쓰기 시리즈입니다. 여기에서 ‘남성성’이란 R.W.코넬의 저작 『남성성/들』에서 인용한 것으로, 하나의 ‘남성성’이 존재한다기보다 만들어지고, 수행되는 개념으로서 한국사회의 남성성이 어떻게 실천되고 유지되는가를 성찰적으로 나누기 위한 개념으로 사용하였습니다.
기획: 윤영 (노동당 여성위원회 조직국장)
사진: 김민
편집: 김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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