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아웰레(Ijeawele)에게, 혹은 15개의 제언으로 이루어진 페미니스트 선언

정말 기쁜 일입니다. 또 이름은 얼마나 예쁜지. 치잘룸 아다오라(Chizalum Adaora). 아주 아름다운 아기입니다. 태어난 지 하루밖에 안됐는데 벌써 세상에 호기심을 느끼는 것처럼 보여요. 당신의 메모는 날 울렸습니다. 내가 가끔 얼마나 감정적이 되는지 알잖아요.  “어떻게 이 아이를 페미니스트로 키울까”하는 당신의 고민을, 내가 굉장히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걸 알아 주세요. 내게 페미니즘은 늘 맥락의 문제입니다. 돌에 새겨진 규칙 같은 것은 없어요. 나에게 법칙에 가까운 것이라면  “페미니스트 도구”, 두 가지인데 당신과 이를 공유하는 것으로 시작하려고 합니다.

번째 도구는 당신의  전제, 당신의 출발점이 될 단단하고 확고한 믿음입니다. 전제가 무엇이냐고요? 당신의 페미니스트 전제는 이것이어야만 합니다. 나는 중요하다는 것, 내가 동등하게 중요하다는 것. “어떤 조건 하에서”도, “어떻게 하기만 하다면”도 아닙니다. 나는 동등하게 중요하다. 마침표가 거기서 끝나는 겁니다.

번째 도구는 질문입니다.뒤집어도 결과가 같은가? 라는 질문이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남편이 바람을 피우면 여성의 페미니스트적인 대응은 남편을 떠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맥락에 따라 머무는 것도 페미니스트적인 선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추디(Chudi)가 다른 여자와 잔 것을 용서한다면, 반대 상황에서도 그러니까 당신이 다른 남자와 잤을 때에도 추디가 용서할까요? 만약 그렇다면 당신의 용서도 페미니스트적인 선택입니다. 젠더 불평등이 빚어낸 선택이 아니니까요. 슬프게도 대부분의 결혼 관계에서 현실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유는 젠더에 기반하고 있죠. “남자는 남자니까”라는 부조리한 생각 말입니다.

치잘룸(Chizalum)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에 관한 몇 가지 제언이 있습니다. 하지만 내 제언을 당신이 모두 따른다고 해도 아이는 당신의 바람과 다르게 성장하리라는 걸 알아 두세요. 때로 삶은 그냥 그런 것이랍니다. 중요한 건 당신이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의 본능을 믿으세요. 왜냐하면 아이에 대한 사랑이 당신을 이끌 테니까요.

나의 제언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번째 제언: 온전한 사람이 되세요.

모성은 영광스러운 선물이지만, 모성만으로 당신을 정의하지 마세요. 온전한 사람이 되세요. 이것은 당신의 아이에게 좋은 일입니다. 미국의 선구자적 기자 마를레네 샌더스(Marlene Sanders)는 언젠가 젊은 기자에게 말한 적이 있죠. “일하는 것에 대해 절대 사과하지 마세요. 당신은 일을 사랑하고, 당신이 일을 사랑하는 건 아이에게 주는 커다란 선물입니다.”

일을 사랑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당신이 일에서 얻는 것만 사랑해도 됩니다. 무언가를 하고 돈을 번다는 데서 오는 자신감과 충족감 말입니다. 모성과 일이 상호 배타적인 것이라는 생각을 거부하세요. 우리가 성장할 때 우리 어머니들은 풀타임으로 일했지만, 우리는 잘 자랐잖아요. 적어도 당신은 그래요. 난 아직 좀 두고 봐야 알겠지만요.

시누이가, 당신이 “전통적” 엄마가 되어 집에 머물러야 한다고, 추디에겐 경제적 여유가 있으니 “맞벌이”가족이 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게 나는 놀랍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무엇이든 정당화하기 위해 선택적으로 “전통”을 사용합니다. 시누이에게 맞벌이 가족이야말로 진정한 이그보(Igbo)족 전통이라고 말해주세요. 식민지 시대 이전에는 엄마들이 농사일을 하고 무역을 했으니까요. 그리고는 그를 무시하세요. 생각해야 할 더 중요한 일들이 많답니다.

엄마가 된 지 얼마 안 된 처음 몇 주 동안 스스로를 잘 대해 주세요. 도움을 요청하세요. 사람들의 도움을 기대하세요. 슈퍼우먼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양육(parenting)은 연습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문제고요. (나는 ‘부모parent’라는 말이 동사가 되지 않았다면, 하고 생각하긴 합니다.  이 말이 ‘양육parenting’을 끝없는 죄책감의 여정으로서 경험하는 중산층 현상의 바탕이 되었다고 생각하거든요.)

당신 자신에게 실패할 여지를 주세요. 엄마가 처음인 사람이 우는 아기를 달랠 방법을 잘 알 수는 없습니다. 당신이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인터넷에서 찾아보고, 책을 읽고, 나이든 부모들에게 물어보고, 아니면 그냥 실패하고 배우세요. 자신이 온전한 사람으로 남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당신 자신을 위한 시간을 가지세요. 스스로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충족시키세요.

이걸 “다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는 마세요. 우리의 문화는 “다 하는” 여자들, 하지만 그 칭찬의 전제를 의문시하지는 않는 여자들을 칭송합니다. 나는 “다 하는” 여자들에 대한 논쟁에 관심이 없어요. 그 논쟁은 돌봄 노동과 가사노동이 여성만의 영역이라는, 내가 강력히 반대하는 생각에 기초하고 있으니까요. 돌봄과 가사노동은 성중립적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여성이 “다 해 낼” 수 있는지를 물을 것이 아니라, 일터와 가정에서 엄마와 아빠가 함께 지고 있는 의무를 최대한 잘 지원할 수 있는 방법을 물어야 합니다.

번째 제언: 함께 하세요.

초등학교에서 우리가 동사란 ‘하는’ 단어라고 배운 것을 기억하나요? 아빠도 엄마만큼이나 동사입니다. 추디도 생물학적으로 가능한 모든 것을 해야 해요. 즉 모유 수유를 제외한 모든 것을요. 모든 것이 되고 모든 것을 하도록 학습된 엄마들은 때로 아빠들의 역할을 축소하는 데 공모합니다. 당신은 추디가 당신처럼 딸을 깨끗이 목욕시키지 않거나, 당신처럼 완벽하게 딸 엉덩이를 닦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래서요?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나쁜 일이 뭐란 말입니까? 아빠의 손에 죽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므로 눈길을 돌리고, 당신의 완벽주의와 사회적으로 학습된 의무감을 멈추세요. 아이를 기르는 일을 평등하게 분배하세요. ‘평등하게’란 당신 둘 모두에 달렸습니다. 이게 꼭 문자 그대로 50대50으로 일을 나누거나 날마다 따져보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닙니다. 아이를 돌보는 일이 공평하게 나누어지면 당신이 알 수 있을 테니까요. 억울함을 느끼지 않는다면, 일이 공평하다고 걸 알 수 있습니다. 진정한 평등이 있을 때는 억울함이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도움의 언어에 반대하세요. 추디가 자기 아이를 돌보는 것이 당신을 ‘돕는’ 게 아닙니다. 그는 해야 할 일을 하는 겁니다. 아빠가 “돕고” 있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아이 기르는 게 엄마의 영역이며, 여기에 아빠들이 용감하게도 자원했다고 말하는 셈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아빠들이 어린 시절에 능동적으로 거기 있기만 했더라면 오늘날 더 행복하고, 안정적이고, 세상에 훌륭하게 기여했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 지 상상해 보세요. 추디가 “애 봐주는” 중이라고 말하지 마세요. 아이를 봐주는 사람들은 그 아기에 대해 기본적 책임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추디는 특별한 감사나 칭찬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당신도 마찬가지고요. 당신 둘이 모두 아이 하나를 세상으로 내보내기로 선택했고, 그 아이에 대한 책임은 당신 둘에게 공평하게 있습니다. 상황이나 선택으로 인해 당신이 싱글 맘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그러면 ‘같이 한다’는 것이 선택사항이 아닐 테니까요. 하지만 당신이 진짜 싱글 맘이 아니라면 ‘싱글 맘’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언젠가 내 친구 느와부(Nwabu)는 아이들이 어렸을 때 부인이 떠났기 때문에 자기가 “미스터 엄마”가 되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가 매일 돌봄 노동을 한다는 뜻이었죠. 하지만 그는 “미스터 엄마”가 아니었어요. 단지 아빠였을 뿐입니다.

세 번째 제언: 딸에게 ‘성 역할’이 말도 안 된다는 걸 가르쳐 주세요.

아이에게 “너는 여자니까” 무언가를 해야 한다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고 절대로 말하지 마세요.

“넌 여자니까”는 어떤 경우에도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절대로요.

어렸을 때 “빗자루 질을 할 때는 여자처럼 허리를 굽혀라”는 말을 들었던 걸 기억합니다. 빗자루 질은 여성인 것과 관계된 일이라는 뜻이죠. 난 그들이 “그래야 마룻바닥이 더 깨끗해질 테니까 허리를 굽혀서 쓸어라”라고만 했다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내 남자 형제들이 같은 얘기를 들었다면 좋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최근 나이지리아 소셜 미디어에는 여성과 요리에 대한 논쟁이 있었죠. 아내들이 남편들에게 어떻게 요리를 해 줘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 말입니다. 이것은 우스운 일입니다. 슬픈 일들이 우스꽝스러운 경우가 있잖아요. 2016년에 우리는 아직도 요리가 여성들의 ‘결혼 능력 테스트’나 되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으니까요.

요리에 대한 지식이 질에 탑재되어 있는 건 아닙니다. 요리는 배우는 것이죠. 요리, 혹은 가사일 전반은 남자 여자 모두가 갖추고 있으면 좋을, 생활 속의 기술입니다. 남자든 여자든 갖지 못할 수도 있는 기술이죠.

결혼이 여성에게 주어지는 상이라는 식의 사고에도 의문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이 부조리한 논쟁을 이루는 기반이니까요. 여성들이 결혼을 상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그 상을 타기 위해 요리를 해야 하는 아내에 대한 논쟁도 줄어들 것입니다.

세상이 얼마나 일찍 성 역할을 주입하기 시작하는지는 흥미로운 일입니다. 어제 나는 치잘룸의 옷을 사기 위해 아동복 가게에 갔습니다. 여자아이 코너에는 연한 분홍색 옷들이 있었죠. 나는 그것들이 싫었습니다. 남자아이 코너에는 강렬한 파랑색 옷들이 있었습니다.  치잘룸의 갈색 피부에는 파랑이 어울릴 것이고 사진도 잘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그걸 하나 샀습니다. 카운터에서 계산원은 내가 산 것이 남자아기를 위한 완벽한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난 그게 여자아기를 위한 것이라고 했죠. 그는 너무 놀라더군요. “여자아이에게 파랑색을요?”

이 분홍과 파랑의 이분법을 발명한 똑똑한 마케팅 업자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핏기 없는 회색들이 진열된 ‘성 중립적인’ 코너도 있었죠. ‘성 중립적’은 멍청한 개념입니다. 남자는 파랑, 여자는 분홍이고 ‘성 중립적’은 그 자체로 하나의 카테고리라는 전제에 기반하고 있으니까요. 왜 모든 아기 옷들이 나이에 따라 모든 색깔을 가지고 있으면 안될까요? 남자아기와 여자아기의 몸은 비슷하지 않습니까.

나는 성에 따라 분류된 장난감 코너도 보았습니다. 남자아이들을 위한 장난감은 대다수 능동적이고, 어떤 ‘행위’를 전제하죠. 기차나 자동차 같은 것들 말입니다. 여자아이들용 장난감은 ‘수동적’이고, 거의가 인형들입니다. 나는 우리 문화가 얼마나 일찍 남자란 어때야 하고 여자란 어때야 하는지에 관한 생각을 형성하는가에 의해 충격을 받았습니다.

내가 7살짜리 나이지리아 소녀가 그의 엄마와 함께 미국 쇼핑몰에 간 이야기를 한 적이 있나요? 무선으로 조종할 수 있는 날아다니는 장난감 헬리콥터에 매혹된 소녀는 엄마한테 그걸 사달라고 했죠. 엄마는 “안 돼, 넌 인형들이 있잖아.”라고 했어요. 그러자 소녀가 말했습니다. “엄마, 난 인형들하고만 놀아야 해?”

난 그 일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소녀의 엄마는 물론 좋은 의도였을 것입니다. 그는 여자아이들은 인형을 가지고 놀고 남자아이들은 자동차를 가지고 논다는, 성 역할 개념에 익숙했습니다. 지금에 와서야 나는,  그 어린 소녀가 그때 헬리콥터를 탐색할 기회를 가졌다면 혹시 혁명적인 엔지니어가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어린아이들 역할 속에 구속지 않을 때,  아이들의 잠재력은 모두 발휘될 수 있습니다. 치잘룸을 개인으로 여겨 주세요.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여자로 보지 말고요. 아이의 강점과 약점을 개별적 방식으로 보세요. 아이를, 여자는 어때야 한다는 저울 위에 올려놓지 마세요. 자신의 최고 버전이라는 저울 위에 올려놓으세요.

언젠가 내게 한 젊은 여성이, ‘남자아이처럼’ 굴었던 시절이 있었다고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축구를 좋아했고 드레스는 지루하다고 생각했죠.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남자아이 같은” 관심사들을 끊도록 종용했을 때까지요. 이제 그는 자신이 여자아이처럼 행동하도록 도와준 어머니에게 고마움을 느낍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슬펐습니다. 나는 그의 어떤 부분이 침묵 당하고 질식 당해야 했을지, 그의 영혼의 어떤 부분이 상실되었을 지를 생각합니다. 남자아이처럼 행동한다’라고 칭한 그 부분은, 자신으로서 행동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의 또 다른 지인은 한 살짜리 아들을 놀이 그룹에 데려갔을 때 일어난 일을 얘기해 줬습니다. 그는 여자아기 엄마들이 매우 엄격하며 여자아기들에게 계속 ‘만지지 마’라거나 ‘그러지 말고 얌전히 있으렴’이라고 말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남자아기들은 더 많이 탐색하라고 격려 받고, 얌전히 있으라는 말을 거의 절대로 듣지 않으며 행동을 그만큼 제어 당하지도 않는데 말이죠.

성 역할들은 너무 깊이 각인되어 있어서 진정한 욕망, 필요, 행복과 배치될 때조차 우리는 종종 그것들을 따릅니다. 한번 학습되면 떨쳐버리기 어렵기 때문에, 치잘룸이 처음부터 이것들을 거부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 역할 대신, 자립을 가르치세요. 자신이 스스로 무언가를 하고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치세요. 무언가 고장 났을 때 스스로 고쳐보도록 가르치세요. 우리는 여자들이 무엇을 못한다고 쉽게 가정합니다. 아이가 해보게 하세요. 아이에게 블록이나 기차 같은 장난감들을 사주세요. 원한다면 인형들도 사주고요.

(계속)

 

이 글은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의 저자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가 이제아웰레에게 보내는, 딸을 페미니스트로 키우는 15개의 제언입니다.  열다섯 번째 제언까지 연재합니다.

원제DEAR IJEAWELE, OR A FEMINIST MANIFESTO IN FIFTEEN SUGGESTIONS
원문 게재일: 2016년 10월 12일
최종 수정일: 2016년 11월 24일
원저자: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Chimamanda Ngozi Adichie)
번역: Lee Shin
편집: oos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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