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하던 짓은. 어렸을 때 늘 하던 짓이지. 기억 안 나? 여섯살 때부터 방 청소하고 설거지하구 엄마 웃으라구 들판에 꽃 핀 거, 꽃꽂이도 해놓구. (…) 난 엄마 거니까, 엄마가 하지 말란 짓은 못하지. (…) 여섯살 때, 할머니 집 앞 들판에서 약 먹였을 때, 나 분명히 알았거든. 난 엄마 거구나. 그러니까, 약을 먹으라고 하면, 무서워도, 먹어야 하는 거구나. (…) 잘못했다 그래, 나한테. 잘못했다 그래, 나한테! 왜 그랬어 나한테? 내가 엄마 거야? 엄마가 낳았으니까 엄마가 죽여도 돼? (…) 나한테 왜 그랬어, 말해! 내가 왜 엄마 거야, 내가! 왜 엄마 거야! 말해! 왜! 내가 엄마 거야? (…) 나 정말 싫어. 나 정말 엄마가 싫어!” (tvN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 9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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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혐오로서의 여성혐오

드라마를 본방으로 보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약 6~7년 전부턴 일년에 한두편, 꼭 보고 싶은 드라마가 생기면 종영 이후 다시보기를 통해 드라마를 보고 있다. 노희경 작가의 신작이 방영중이라는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열흘 즈음 전, 우연히 포털 사이트에서 「디어 마이 프렌즈」의 짤막한 클립을 보게 되었다. 앞에 인용한 대사의 방송분이었다. 박완(고현정 분)이 엄마인 정난희(고두심 분)에게 왜 여섯살짜리 자신에게 약을 먹였냐며, 내가 엄마 거냐며 30여년간 쌓아온 분노를 터뜨리는 장면이었다. 몇번을 되돌려 봤는지 모른다. 설명할 수 없는, 이유 모를 카타르시스에 압도되어 나는 이 장면을 돌려 보고, 다시 또 돌려 보기를 반복했다. 무엇이 그토록 나를 사로잡았던 것일까. 무엇에 나는 그토록 이끌렸던 것일까.

근 일주일을 이 장면에 매달리고, 앓았다. 그러고서야 내 안의 뒤섞이고 얽힌 여러 조각들이 어떤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회학자 우에노 치즈코(上野千鶴子)는 그의 저서 『여성혐오를 혐오한다』에서 이에 대해 ‘자기혐오로서의 여성혐오’라는 주제로 약 3장에 걸쳐 기술하고 있다.

프로이트는 ‘아들은 어떻게 아버지가 되고 딸은 어떻게 어머니가 되는가’라는 질문, 즉 발달에 관한 이야기를 남겼다. 가부장제 속에서 이 질문은 다음과 같이 바꿔 말할 수 있다. ‘아들은 어떻게 여성혐오적인 아버지가 되고, 딸은 어떻게 여성혐오적인 어머니가 되는가?’ (…) 결혼 말고도 사회적 달성을 성취할 수 있는 길이 여성에게 열리게 됨으로써 딸 또한 어머니의 기대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힘들어지게 되었다. 딸은 ‘여자 얼굴을 한 아들’이 되었고 아들과 딸에 대한 기대 차이는 축소되었다. (…) 그러나 어머니의 딸에 대한 기대는 아들에 대한 기대와는 달리 양의성을 가지고 있다. 어머니는 딸에게 ‘아들로서 성공하라’와 딸(=여자)로서 성공하라‘를 동시에 보낸다. (…) 아들의 경우 이야기는 간단하다. 출세하여 아버지의 횡포로부터 어머니를 구출하고 어머니에게 충성과 효도를 다 할 것. (…) 딸의 경우는? (…) 저 출산이 진행되면서 딸은 ‘여자 얼굴을 한 아들’이 되었다. (…) 딸은 아들과 같지 않다. 딸도 아들처럼 어머니의 기대에 답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동시에 딸로서의 기대에도 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어머니를 미워하는 것은 용서되지 않는다. 그 어떤 경우에도. 어머니를 미워하는 것만으로도 딸은 자신의 비인간적인 심성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억압자인 동시에 희생자이기 때문이다. (…) 딸은 어머니가 살아있는 한 어머니의 속박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 (…)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원망의 감정은 자책감과 자기혐오로서 나타난다. 딸은 어머니를 좋아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 역시 좋아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딸의 분신이며 딸은 어머니의 분신이기 때문이다. 딸에게 있어 여성 혐오란 언제나 어머니를 포함하여 스스로에 대한 자기 혐오가 된다. (우에노 치즈코,『여성혐오를 혐오한다』 중. 강조는 글쓴이)

즉 근대사회에서의 어머니는 딸을 자신의 소유물이자 ‘노력’을 통해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여 어머니의 인생을 보상해주는 존재로 보면서도 ‘아들이자 딸’이라는 불가능한 요구를 하는 어머니를 ‘결코 미워해서는 안 되고’, 언제까지나 어머니의 비위를 맞춰주는 종속적 위치에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이와 같은 억압의 근본 이유는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지는 부계중심의 가부장적 사회질서다. 가부장적 가족 질서 속에서 여성의 역할은 ‘아내’ 혹은 ‘엄마’ ‘딸’로 지정되어 있으며, 어머니는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딸이 이 같은 가부장적 질서 속의 ‘딸’이라는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기를 기대한다. 딸이 이 기대에 부응하지 않는 것은 곧 어머니 자신의 인생을 부정하는 것이며, 가부장적 질서 속에서 억압당하고 축소당하고 착취당했던 시간에 대해 직접적인 방식으로 ‘틀렸음’을 선고하는 것이다(나의 분신이 나와 같은 생의 복제를 거부한다).

 

엄마 이해하기

드라마 이야기로 돌아가자. 완은 여섯살 때, 아버지가 바람을 피우고 이를 목격해 충격에 빠진 난희에 의해 약이 든 요구르트를 마신다. 난희는 딸과 함께 동반자살할 생각이었으나 요구르트를 반쯤 삼킨 완을 보고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약을 더 먹지 못하게 한다. 완은 이 날의 충격으로 절대 엄마의 눈밖에 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쓴다. 엄마가 하지 말라는 일은 절대 하지 않고 오직 엄마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만 살아가기를 선택한 완. 그렇게 30여년이 지난 어느 날, 자신이 목숨처럼 사랑했던 사람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무엇인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드디어 30여년 전의 일에 대해 따져 묻기 시작한 것이다.

좀 더 생각해보자. 완의 입장뿐 아니라 난희(엄마)의 입장에서도 생각을 해보아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착한 딸이니까. 그러니까, 어느 엄마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을 두고 생때같은 자기 자식을 죽일 생각을 하겠느냐고. 그리고 이것이 난희 혼자만의 잘못인가? 어린 딸과 아내를 두고 믿음과 사랑을 배신한 완의 아빠가 애초에 원인 제공자가 아니겠는가? 오죽 막막했으면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여섯살배기 아이와 함께 죽으려 했을까 말이다,라는 흔하디흔한, 그러나 어딘가 께름칙한 ‘엄마 이해하기’. 이렇듯 엄마를 이해하기 위한 시도는 상황을 합리화하고 일견 공정해 보이는 결론을 도출하는 데 유효하다. 그러나 또한 이 시점에서 나는, 완이 아들이었다면 과연 난희가 아들과 함께 죽으려고 했을까 싶은 것이다. 조심스럽게 추측하건대 완이 아들이었다면 난희는 딸에게 하듯이 동반자살을 하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들은 딸과 달리 ‘엄마’의 분신이 아니니까. 잘 자란 아들이야말로 아버지에게 복수하고 가부장적 질서에서 어머니를 구출해낼 유일한 희망이자 최초의 구원자가 될 터이니!

 

딸도 엄마를 죽이고 싶다

딸과 모체의 동일시에서 조금 더 나아가보자. 모성은 여자의 본능이 아님이 최근에서야―이에 대한 무수한 공격, 비난, 모성찬양에 대한 침묵으로써의 동조는 여전하지만―겨우 알려지고 있는 가운데, 모성은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발칙한 주장보다도 더욱 급진적인(!) 주장, 즉 ‘자식 살해 심리’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아래는 여성학자 정희진의 칼럼 일부이다.

나는 쌔근 잠들어 있는 100일도 안 된 딸을 보고 묘한 (가학적)감정에 사로잡힌 적이 있는데, 내게 상담을 청한 어떤 여성이 그런 나의 무의식에 일격을 가했다. “저는 잠들어 있는 아이를 보면 목 졸라 죽이고 싶어요. 선생님은 안 그러세요? 그 애가 나를 밖으로 못 나가게 하고 내 미래를 빼앗아갔잖아요?” (정희진, 「욕망으로서 매져키즘 – <피아니스트>에게」 중)

고백하건대 나는 단 한번도 아이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으면서도, (최근 들어 유전자 복제 욕구라는 것에 대해 조금 실감은 하고 있다) 이 내담자와 같은 감정을 아주 오랜 옛날부터, 십대 시절부터 가지고 있었다. 아이를 가지게 되는 그 순간부터 내 몸은 나의 것이 아니며, 내 시간은 나의 시간이 아니며, 내 인생은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님은 아무리 어린 소녀라도 모를 수 없을 만큼 자명한 것. 지금의 나는 소녀 시절에 비해 아주 약간의 학력과 쥐꼬리만한 월급을 얻었고, 이 쥐꼬리만한 나의 ‘자유’를 아이 때문에 잃을 수는 없다는 절박함은 소녀 시절의 막연한 거부감과는 비할 바 없이 커져 가히 임신 공포에 가깝다. 그러니 실제로 아이가 생겨 출산 이전의 자유를 영원히 잃은 여인의 박탈감은 어떠하겠는가? 아이를 목 졸라 죽이고 싶다는 여성의 고백을 읽으며, 나는 완이 난희에게 피를 토하며 “내가 엄마 거냐”고 외치던 장면을 목도한 그 순간만큼이나 절절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있지도 않은 자식을 목 졸라 죽이는 상상을 통해 나는 아직 박탈당한 바 없는 내 미래를, ‘자식’이라는 위협으로부터 지켜내는 것이다! 이 무슨 모순된 감정이란 말인가? 엄마를 증오하는 완에게 이입하면서, 또한 자식을 목 졸라 죽이고 싶어하는 모성에도 이입하다니! 일견 기묘해 보이는 이 모순은 가부장적 질서 아래의 딸에게는 양립 가능한 감정이다. 여성 주체들은 본능에 가까운 관찰과 학습 효과로 ‘엄마’라는 존재의 천형과도 같은 고통을 이해하고, 엄마가 자신을 죽이고 싶어함을 절절히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엄마를 누구보다 동정하는 이 딸들은, 당연하게도 ‘엄마를 죽이고 싶다’.

엄마가 자신의 시간과 생명과 미래를 갉아먹는 존재인 딸을(자식을) 목 졸라 죽이고 싶어한다면, 반대로 딸은 왜 자신을 세상에 ‘내던진’ 존재가 자신을 죽이고 싶어하는 상황에 맞서선 안 되는가? 왜 우리는 그러한 욕구에 대해 언급해서도 안 되며 심지어 알고 있다는 내색조차 해선 안 되는가? 왜 딸의 엄마에 대한 분노는 부끄러워해야 마땅한가? 갈 길 잃은 분노는 어디로 향하는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같은 선에서 언급되는 엘렉트라 콤플렉스는 틀렸다. 아버지를 뛰어넘고자 하는 아들은 권장하면서 어머니를 뛰어넘고 싶은 딸은 외면하는 신화는 반쪽짜리다. 모녀의 긴장에 아버지가 설 자리는 없다. 태어날 때부터 인간성―특히 ‘남성성’으로 일컬어지는 본성―이 거세된 딸과 그 인간성을 태내부터 거세하고 자기혐오로서의 여성혐오를 물려준 모성 사이의 갈등은, 가부장제가 거세한 ‘인간성’을 회복하고자 분투하는 두 여성적 주체의 갈등인 것이다.

 

이라는 가부장제 속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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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헨젤과 그레텔」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계모에게 시달리다가 집에서 쫓겨나 과자 집에 도착한 그레텔은 노파를 화덕에 밀어넣어 불태워 죽이는 이 이야기가 자식을 억압하는 모성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은 꽤나 유명한 해석이다. 부모에게 한없이 의존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이면서도 부모의 억압에 반감을 가지는 아이들은, (친엄마는 부재하기 때문에 양심의 거리낌 없이) 계모는 쫓아내고 가짜 엄마는 불태워 죽이는 이 이야기에 열광한다. 헌데 가만히 보면 「헨젤과 그레텔」에서조차 아들인 헨젤은 ‘잘 먹고 살찌는 존재’이며 딸인 그레텔은 ‘노파의 분신이 되어’ ‘가사노동을 착취당하는’ 존재이다.

동화 속에서 그레텔과 헨젤은 그들을 괴롭히고 착취하는 계모도 노파도 제거하고 평화를 쟁취하지만 한국의 무수히 많은 그레텔들은 어떠한가? 우리 사회는 그레텔들에게 딸, 아내, 엄마 중 하나가 될 것을 강요한다. 딸들은 무엇을 선택할 수 있고 무엇을 선택하지 않을 수 있는지 모르도록 키워진다. 설령 운이 좋아 결혼과 출산을 거부하더라도 ‘딸’이라는 가부장제 속 역할은 여전히 남는다. “마치 그것이 가부장제의 산물이 아닌 것처럼 그렇게”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역할이 “딸”이라는 자리다.


왜 딸은 언제까지고 자라지 않는 그레텔이어야 하는가

그레텔도 엄마를 죽이고 싶다.

엄마의 푸념―너도 여자니까 엄마를 이해하게 될 거야―을 감내하고, 희생자인 어머니를 언제까지고 동정하고 편들어주는 딸, 그러면서 또한 ‘아들처럼’ 사회적으로 성공해서 엄마가 못다 이룬 꿈을 이뤄주는 딸! 하지만 여자로서 결혼하고 출산하여 엄마의 인생을 재현해주는 딸, 그야말로 모성의 분신! 엄마가 자신의 존재를 족쇄처럼 붙잡고 있는 아이에게 내밀한 가학적 충동을 느끼듯, 아이 또한 마찬가지다. 딸도 엄마를 죽이고 싶다. 엄마가 족쇄 같은 자식을 목 졸라 죽이고 싶듯 딸도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는 엄마를 죽이고 훨훨 날아가고 싶다.

나는 가끔 나 자신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다. 엄마의 그 모든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너무나 버겁다. 갈 길 잃고 방황하는 나의 분노를 주체할 수 없을 때면 차라리 내 몸을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상상을 한다. 분노가 내 안으로 향할 때, 벼락 맞은 거목이 쓰러지며 두 동강 난 나무둥치의 뾰족한 끝이 뱃가죽을 뚫고 나오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낄 때, 내 온몸은 슬픔에 파묻힌다. 지친 고개를 들어 엄마와 눈을 마주칠 때면, 언제나 그래왔듯 엄마의 상처받은 눈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아프게 깨닫는다. 내가 또 엄마를 배신했구나! 이 얼마나 배은망덕한 딸년인가!

 

가부장제 질서 속에서의 모녀관계, 그 애증에 대하여

그레텔도 엄마를 죽이고 싶다.

우리는 외면하지 않고 정확히 말해야 한다. 왜 그레텔은 엄마를 죽이고 싶어하는지.

엄마와 딸이라는 인류 재생산의 그 근원에 가장 가까운 관계가, 우리의 타고난 힘과 사랑만으로는 아무리 해도 진정한 의미의 회복으로 다가갈 수 없는 갈등관계에 놓이도록, 결코 개인의 힘과 노력만으로는 이 왜곡된 관계를 바로잡을 수 없도록, 갈등을 조장해오고 조장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왜 나는 나의 엄마와 인간 대 인간으로 바로 설 수 없는가. 왜 딸은 언제까지고 자라지 않는 그레텔이어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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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의 근원적 관계를 더 이상 짓밟히게 두어서는 안 된다. 모녀관계는 가부장제 질서 속에서 짓이겨져 있다. 여성혐오적 가부장적 질서는 개인만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 간의 관계 또한 왜곡하고 망가트린다. 이 관계에는 모녀관계 이외의 가족관계도 당연히 포함될 것이다. 완이 엄마에게 울부짖은 말들이 내 마음에 뼈아프게 와닿았던 것은 바로 그런 관계의 파탄을 나 또한 너무나 가슴 깊이 고통스러워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사랑을 방해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지금과 같지 않은 사회 속에서 우리의 삶은 사랑으로 인해 얼마나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그런 세상 속에서의 엄마와 나는 얼마나 서로를 애틋하게 여길까! 서로가 서로를 바라볼 때 세상 그 누구보다 닮은 듯 다른 두 사람이라는 것은 ‘평생을 찾아 헤맨 나의 반쪽’이 아니고 달리 무엇이겠는가? ‘영원한 사랑’이라는 상상력은 어쩌면 페르세포네를 찾아 헤매던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 계절이 바뀌고 해가 바뀌어도 지칠 줄 모르는 데메테르의 딸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닐까. 엄마를 그리워할 때면 나는 언제나 이러한 달콤한 생각을 그만둘 수가 없는 것이다.

 

 

글: 희원(Agnes)

편집: ㅊㅈ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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