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성으로 태어났지만, 다른 여성들처럼 일어날 지 안 일어날 지 모르는 범죄를 두려워하며 살고 있지는 않다. 항상 마음을 졸이며 두려워하다 미처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해서 내가 막지 못한 범죄의 희생자가 되느니 마음이라도 편하게 먹고, 내 행동에 제약을 두지 말고 살자는 다짐을 했기 때문이다. 술 한 잔하고 집에 들어갈 때,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늦은 새벽에 귀가할 때, 무섭긴 하지만 사실 위험한 건 밤이나 낮이나 똑같다는 생각을 하며 아무렇지 않게 밤길을 돌아다니곤 한다. 화장실 몰래카메라가 극성이라지만, 누구나 대·소변을 보는데 내가 볼일을 보는 영상이 찍힌다고 해서 그것이 내 평판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나는 다른 주변 여성들이 너무 답답하고 불편했다.

3년 전이었다. 나는 집에서 멀리 떨어진 대학에 입학해 기숙사에서 살게 되었다. 기숙사 입구에는 경비실이 있어 모두 경비 아저씨와 눈을 맞추고 나서야 기숙사에 들어올 수 있었고, 쓰레기 버리는 곳은 기숙사 각층 화장실 앞에 있었다. 그래서 나는 안전함을 느꼈고, 택배 상자를 버릴 땐 송장을 떼지도, 이름을 지우지도 않은 채로 버렸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같은 기숙사에 사는 여자 친구를 길에서 만났다. 그 친구는 화장실 앞에서 내가 버린 택배 상자를 봤고, 매직으로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를 대신 가려주었다며 다음부터는 꼭 송장을 떼서 버리라고 했다. 그 순간 해가 지면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하던 외할머니의 모습과 그 친구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 때 내 택배 상자의 개인정보를 지웠던 그 친구와 나는 아직 친한 친구로 지내고 있다. 지난 시험 기간에는 일몰 후에 깜깜한 캠퍼스를 걷는 걸 무서워하는 그 친구를 위해 도서관에서 기숙사까지 10여 분 정도 걸리는 길을 함께 걸어 배웅해주기도 했다.

실체 없는 공포 때문에 자신의 행동을 제한하는 (답답한) 여성은 그 친구만 있는 게 아니다. 늦은 시각, 깜깜한 밤에 혼자 집을 나서지 못하는 것은 여성이 가지고 있는 당연한 특징 비슷한 것이고, ‘무서워서’ 기숙사 창문을 열어놓지 못하는 친구도 있고, 남성이 신던 허름한 신발을 받아와 자취방 문 앞에 놓아두는 친구도 있고, 클럽이나 술집이 즐비한 유흥가를 무서워하는 친구도 있고, 집 밖에서는 절대로 화장실을 쓰지 않는다는 친구도 있다. 그런 친구들이 답답하고 꽉 막혀있다 생각하는 나는 평소에 배달음식은 자취방 건물 밖에서 받고, 택배기사에게 절대로 문을 열어주지 않고, 집에 오는 길엔 호신용품을 들고 걸으며, 지금 거주하는 자취방이 있는 건물에 들어갈 때는 주변을 둘러보고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들어간다. 누군가가 길에서 보고있다가 내 방에 불이 켜지는 걸 보고 내 주소를 파악할까봐. 그래서 밤에 나갈 땐 되도록이면 불을  켜놓고 나간다. 모두 일상적인 일이며 그것이 크게 내 일상생활에 지장을 준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아마 또 다른 누군가가 보기에는 나 자신도 답답하고, 쓸데 없이 걱정 많은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매일 ‘조심’ 해야만 하는 삶을 완전히 벗어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너무나 많은 여성이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서 여성혐오 때문에 죽었음을 알고 있고, 나를 포함한 여성들은 여성혐오 범죄의 원인을 스스로에게 돌리며 실체 없는 두려움 속에서 항상 행동을 ‘조심’해야 함을 교육받아왔기 때문이다.

지난 5월 발생한 살인사건은 어릴 적부터 모든 한국 여성이 갖고 있던 두려움의 실체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내가 종종 아무런 두려움 없이 지나다니던 번화가에서 한 여성이 잔인하게 살해당했다. 그 사건은 언젠가 나에게 일어날지 모른다 배워왔던 일이었다. 그리고 기억 속 가장 과거의 시간부터 매일 집을 나설 때마다, 집을 들어올 때마다 머릿속으로 상상할 수밖에 없었던 일이었다. 지금까지 상상해온 일들은 아무리 내 행동을 제한하고 조심해도 막을 수 없는, 그저 운이 좋기만을 기도할 수밖에 없음을 알려주었다. 때문에 내게 고인의 죽음은 더더욱 슬프고 처절한 공포로 다가왔다.

글쓴이: 퍼포린
편집: 김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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