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디아는 가정, 학교, 직장, 신앙 공동체, 정당, 광장을 포함해 한국 사회 어디에서나 발생하는 폭력의 피해자들과 함께하고자 성폭력을 추방하고 피해자를 옹호하기 위한 방법을 고민하는 자료를 모집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녹색당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를 지지하고 녹색당 뿐 아니라 모든 정당들이 차별과 폭력에 대한 인권감수성을 높이고 실효성 있는 성폭력 방지, 대응 체계를 구축할 것을 촉구하기 위한 글임을 밝힙니다. 녹색당 성폭력 사건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대리인을 통해 전달받은 피해자의 의사를 따라 이루어졌습니다.

어떤 상처는 시간이 흘러도, 아니 시간이 흐를수록 아픕니다. 사회적 불평등으로 인한 힘을 가진 타인이 그와 같은 힘을 가지지 못한 사람에게 폭력을 휘둘러서 입힌 상처일수록, 그리고 또 다른 타인이 그 상처를 방관했을수록 더욱 아픕니다. 상처를 입힌 사람과 상처를 입은 사람이 같은 공동체의 일원인 경우, 그 공동체에 속한 수많은 타인들의 방관은 더더욱 아픕니다. 이때의 방관은 한 사람이 자신이 가진 사회적 힘을 이용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힌 행위를 사전에 적극적으로 방지하거나 사후에 거세게 규탄하지 않는 방관입니다. 상처를 입은 사람에게 상처에 대한 책임의 화살을 돌리거나 공동체의 이익을 운운하며 아픔을 호소하는 사람의 관점을 배격하는 일은 방관을 넘어 또 다른 상처를 입히는 일입니다.

얼마 전 저는 저 자신은 상처를 입힌 사람도 아니고, 상처를 입은 사람도 아니며, 그들이 속했던 공동체의 일원도 아니지만 어쩌다보니 상처를 입은 사람의 아픔을 목격하는 경험을 했습니다. 상처를 입힌 사람과 그의 편에 선 사람들의 오만과 어리석음, 폭력은 날이 선 칼이 되어 상처를 입은 사람의 온몸에 꽂혔습니다. 또한 그들이 속한 공동체가 이와 같은 폭력을 사전에 방지하거나 사후에 규탄할 적절한 체계를 가지지 못했다는 사실은 상처를 입은 사람를 위한 정의를 세우는 일을 지극히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이 글은 상처를 입은 사람인 제 친구를 지지하고 함께하는 마음으로 씁니다. 상처를 입은 사람이 상처를 입힌 사람의 사과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입힌 사람이 상처를 입은 사람의 용서를 구하는 것이 당연한 세상을 꿈꾸기 때문에 저 또한 이 경험을 통해 그동안 저로 인해 상처를 입었을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사죄의 뜻을 전하고 용서를 구해야겠다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상처를 입힌 사람들은 상처를 입은 사람에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사과를 하고, 그들이 속했던 공동체는 상처를 입은 사람의 관점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변화를 일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상처를 입은 사람과 함께하는 일은 어렵습니다. 상처를 입은 사람보다는 상처를 입힌 사람과 함께하고 싶은 경우도 더러 있겠지만, 많은 경우는 상처를 입은 사람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어떻게 함께하는 것이 상처를 입은 사람을 가장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인지 방법을 몰라서 어렵기도 합니다. 방법을 모르는 상태에서 그저 자기 위주의 어림짐작으로 상처를 입은 사람과 함께하려 시도했다가 도리어 더 큰 상처를 입힐 가능성도 있기에 어렵기도 하고, 상처를 입은 사람과 함께하는 과정에서 그 사람의 고통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끼게 되기에 어렵기도 합니다. 모든 상처는 고유하고 사람들은 저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이 입은 상처에 대한 정의를 추구하기에 모든 경우에 적용할 수 있는 <상처를 입은 사람과 함께하는 방법 안내서>를 만드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상황에 따라서는 상처를 입은 사람과 함께하는 경험을 오래 한 사람들의 제안을 참고해도 좋겠지요.

제가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를 준 친구는 자신에게 폭력을 휘둘러 상처를 입힌 사람들과 공동체에 책임을 묻고 사과를 요구하는 용감한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그 과정을 안절부절 못하며 지켜보기만 하던 저를 믿고 제가 함께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고마운 친구가 상처를 딛고 정의를 찾길 기도하는 마음으로 상처를 입은 사람과 함께하는 일, 다른 말로 피해자 옹호(victim advocacy)에 대한 제안을 몇 가지 찾아 이 공간에 나눕니다. 혹시 이 외에 추가할 만한 제안이나 이와 다른 의견이 있으시면 댓글이나 메시지로 남겨주실 것을 부탁합니다.

1. 폭력의 특징과 폭력의 효과인 트라우마(상처)의 특징에 대해 배우자.

2. 트라우마에 대한 반응은 한 가지가 아니라 사람마다 다르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나’라면 어떻게 반응했을지, ‘상식적’인 사람은 어떻게 반응했을지 등의 추상적인 기준으로 피해자의 반응을 재단하지 말자.

3. 피해자가 자신이 겪은 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나’의 선입견, ‘사회’의 ‘상식’을 잠시 내려두고 온전히 그 이야기에 집중하여 피해자에게 힘과 애정, 믿음을 전달하자.

4. “너의 잘못이 아니다”라는 말을 반복하자. 피해자가 언제, 어디서, 어떤 행동을 했건 폭력은 피해자의 탓이 아니다. 가해자를 위한 변명은 절대로 하지 말자. ‘착한 사람’, ‘흠이 없는 사람’, ‘상식적인 사람’만이 피해자인 것은 아니다. 피해자를 문제삼는 대신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가한 폭력과 고통에 초점을 맞추자.

5. 피해자가 겪은 폭력과 고통에 함께 분노하고 함께 슬퍼하자. 폭력은 누구에게도 일어나서는 안 되는 악인 동시에 누구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현실이다. ‘너’에게 상처를 입힌 세상에 ‘나’도 살고 있다.

6. 가장 중요한 것은 피해자의 마음과 안녕이다. 가해자의 책임을 물어 정의를 세우는 일도, 피해자가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 일도 피해자의 마음과 안녕에 달려있다. 고통을 겪고 있는 피해자가 마음을 추스르고 안정된 일상을 되찾을 수 있도록 피해자의 생존을 돕자. 이때, ‘내’가 또는 ‘우리’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왜 ‘너’는 아직도 피해를 호소하냐는 식, 또는 왜 이제서야 말하냐는 식으로 피해자를 탓하지 않도록 주의하자. 다시 말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내’ 마음과 안녕, ‘우리’ 마음과 안녕이 아니라 피해자의 마음과 안녕이다.

7. 피해자의 이야기를 믿자. 피해자의 이야기를 믿지 않는 것은 가해자, 가해자와 함께하는 사람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힘을 가진 사람의 편을 들어주는 ‘사회’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 같은 맥락에서, 피해자가 느끼는 감정을 축소, 확대하거나 왜곡, 부정하지 말고 피해자의 언어대로 온전히 받아들이자.

8. 피해자의 이야기는 피해자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사람에게, 원하는 방식으로 하는 것이다. 피해자가 자신의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나’와 나누어야 할 당연한 의무란 없다. ‘내’가 피해자의 이야기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피해자의 인권을 존엄히 생각해야만 피해자가 ‘나’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고 ‘나’도 피해자를 도울 수 있다. 피해자가 자신의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나’와 나누었다면 ‘나’는 그 사람이 원하지 않는 때에,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피해자의 이야기를 발설해 피해자를 해치고 피해자가 ‘나’에게 준 신뢰를 배신하지 말자.

9. 피해자에게 ‘너’를 돕기 위한 ‘나’의 조언이랍시고 이래라 저래라 지휘하지 말자. 대신 피해자에게 ‘너’를 돕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혹시 있다면 알려달라 부탁하자. 피해자가 겪은 폭력과 상처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피해자 자신이다. 피해자가 마음을 추스르고 안정된 일상을 되찾는 과정의 지휘자 역시 피해자 자신이며 ‘나’ 또는 ‘우리’는 피해자를 보조하고 지지하는 역할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치유’, ‘회복’, ‘화해’를 ‘내’ 마음대로 피해자에게 요구하지 말자.

10. 폭력을 겪은 사람에게는 자신의 고통을 표현하고 상처를 치유할 기회가 필요하다. 피해자가 분노, 두려움, 억울함, 불안과 우울을 호소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며 이를 견디기 위해 전문가를 찾는 것 역시 지극히 당연하다. 피해자가 트라우마 전문 의료인이나 상담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개인적으로, 집단적으로, 제도적으로 자원을 마련하자.

11. 피해자의 신체적, 정신적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계획에 함께하자. 많은 경우 피해자는 가해자의 폭력과 가해자에게 동조하는 사람들에게 계속 노출되어 있는 상태다. 이때 피해자에게는 자신의 안전과 미래를 계획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 자원이 필요하다. ‘내’가 이와 같은 시간과 공간, 자원을 제공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폭력의 피해자를 돕는 단체들에 대한 정보를 검색해 피해자에게 전달하고 피해자가 원하는 경우 단체 방문에 동행하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다.

12. 피해자가 자신의 몸 건강, 마음 건강을 돌볼 수 있도록 실질적인 도움을 건네자. 식사를 챙기는 일, 물질을 제공하는 일, 휴식을 권하는 일, 수업 필기를 대신 해주는 일, 집안 정돈을 돕는 일, 노래를 불러주는 일, 재미있는 활동을 함께하는 일, 대화를 나누는 일, 그저 곁에 있는 일 모두 실질적인 도움이다.

13. 고통을 겪고 있는 피해자의 용기와 힘을 긍정하고 피해자에게 응원과 격려의 말을 전하자. 폭력을 경험한 이후에도 피해자의 삶은 계속된다. 피해자가 폭력 이후의 삶을 자신의 방식으로 스스로를 긍정하며 살 수 있기를 기도하는 마음을 전하자.

14. 피해자와 함께하기를 선택한 ‘나’의 몸 건강, 마음 건강을 돌보자. 피해자에게 힘과 용기를 전하고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서는 ‘나’에게 다른 사람을 지지할 여력이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과 함께하며 그 사람의 트라우마를 접하게 되는 것은 그 자체로 대리외상(vicarious trauma)이라고도 불리는 ‘나’의 트라우마가 되기도 한다. 피해자와 함께하는 과정의 중심은 무엇보다도 피해자의 고통이다. ‘내’가 ‘나’의 고통에 잠겨 버리면 피해자의 고통에 제대로 집중할 수 없으니 ‘나’의 고통 또한 외면하지 말고 충분히 돌보자.

15. 폭력과 방관, 불평등을 강화하고 재생산하는 세상을 변화시키자. 개개의 사건 속 가해자에게 책임을 묻고 피해자와 함께하는 일에 더해 ‘나’를 바꾸고 ‘내’가 속한 공동체를 바꾸고 세상을 바꿔 폭력의 사슬을 끊자.

참고

Haven: Live Without Fear, How to Support a Victim of Domestic Violence or Sexual Assaulthttps://www.haven-oakland.org/get-help/support-victim (최종 방문 2017년 2월 2일).

RAINN (Rape, Abuse & Incest National Network), Help Someone You Care About, https://www.rainn.org/articles/help-someone-you-care-about (최종 방문 2017년 2월 2일).

Know Your IX: Empowering Students to Stop Sexual Violence, Support a Survivor, http://knowyourix.org/i-want-to/support-survivor/ (최종 방문 2017년 2월 2일).

글쓴이/편집: 김나영 (nayoungkim@feminist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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