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은 현대 사회의 구성단위 중 하나다. 누군가는 사회 위기를 이야기하며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진다’고 했다. 사회가 집이라면, 가족은 벽돌이라는 식이다. 우다 작가의 웹툰 『그래도 되는가(家)』는 이런 가족주의가 모든 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지 질문을 던진다.

전통적 의미에서 가족이란 씨족에 가깝다. 나와 성씨를 공유하는 사람들의 집단을 가족이라고 부른다. 핵가족이라는 말이 20여년 전쯤 사회현상으로 등장했지만, 여전히 우리는 명절마다 부모님의 부모님을 찾고, 조부모님의 부모님의 묘를 찾는다. 드라마에선 30년 동안 한번 얼굴도 못 본 사람의 얼굴에 난 점을 보고 잃어버린 아들임을 알게 되는, 무언가 신비한 것으로까지 여겨지기도 한다.

씨족사회가 공유하는 것은 이름 앞에 붙는 글자만이 아니다. 유전적 공통점을 가진 가정의 구성원들은 나에게 유전자를 물려준 사람, 즉 부모와의 수직적 위계관계에 익숙해지고, 성장한 다음에는 또 다른 가정을 꾸려 더 큰 가정, 씨족에 편입된다. 그리고 그 위계질서는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미풍양속이라는 이름으로 굳어진다. 『그래도 되는가』의 가정은 그런 의미에서 완벽한 가족이다.

 

우리는 씨족사회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진목최씨 대기공파 문중의 토지를 관리하던 할아버지, 양반집의 딸인 할머니, 강남 유명 성형외과 원장 큰아버지, 지역 유지인 홍씨 가문의 큰엄마, 공군 사관학교 출신, 공군 파일럿인 아빠, 20년차 초등학교 교사이신 엄마. 그리고 성실한 모범생인 동생 최희성, 명문대 재학중인 주인공 최은성과 현재 군복무중인 초등학교 교사 오빠 최민성. 남부러울 것 없다는 말이 이처럼 잘 어울리는 집도 없다. “유복한 가정”의 의미를 그대로 옮겨 놓으면 이 진목최씨 대기공파 문중이 아닐까 싶다. 위계의 피라미드에서 가장 위에 있는 사람은 당연히 할아버지다. 웹툰은 그 할아버지의 죽음에서 시작한다.

할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부터 전통적 가족은 힘을 발휘한다. 이 “유복한 가정”의 구성원들을 위태롭게 연결하고 있던 고리가 끊어지는 순간, 완벽한 가족은 그 실체를 드러낸다. 슬퍼하고 애도할 시간도 없이 바쁘게 음식을 나르고, 죽음을 추모하는 곳에서 성희롱을 당하고,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손님을 맞는 것은 여성이다. 유산상속 포기를 종용받은 둘째의 딸들과 부인이 모든 일을 다 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남성들은 손님을 맞고, 술을 마시고, 시비를 걸고 있다. 할아버지 사망 후 가족의 위계질서에서 가장 상위에 오른 것은 그의 장남이지, 할머니가 아니다. “완벽한” 가족은 위태롭던 과거의 모습을 찾을 수 없이 완전히 붕괴해버린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밖에서 볼 때, 완벽함이란 무의미한 것이다. 가족은 그 구성원만이 참여할 수 있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철저히 폐쇄된 공동체 속에서, 위계질서는 가장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짓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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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되는가』中, 할아버지의 장례식 모습

평화는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도 되는가』의 단골 대사는 ‘너만 가만히 있으면 평화로운데 왜 나서냐’는 말이다. 하지만 평화는 가만히 있을 때 오는 것이 아니다. 평화를 얻기 위해선 협상하고 대화해야 한다. ‘너만 가만히 있으면’이라는 말은, 대화의 시도를 묵살해 폭발하게 만든 태도를 유지한다.

주인공 은성이 추석에 아침부터 마음먹고 준비해 짙은 메이크업을 하고, 소위 ‘세 보이는’ 차림으로 어른들과 한판 붙으려 했을 때, 은성의 아버지는 “그런 말 하려고 무섭게 차려 입고 화장했냐”고 묻는다. 가만히 있으면 평화로운데, 왜 그랬느냐고 묻는다. 하지만 이렇게 만들어진 평화는 위계에 의해 짓눌린 사람들을 배제한 평화다. 단순히 갈등의 부재가 평화라면, 그건 갈등 자체를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생각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문제제기는 보통 ‘누군가가 힘들다’는 신호다. 만약 위계가 역전된 상태에서 문제제기를 했다면 어떨까? 우리는 그걸 잔소리라고 부르기도 하고, 웃어른의 조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평화란, 문제제기를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평화는 누군가가 참아서 오는 것이 아니라, 대화와 토론을 통해 합의점을 찾았을 때 비로소 온다. 하지만 가부장적 위계질서가 굳건한 작은 사회에선, 문제제기를 하는 것 자체가 권위에 대한 도전이고, 갈등을 조장하고 분란을 일으키는 행위다.

한국에 사는 사람들은 이런 경우를 사회 어떤 층위에서든 마주한다. 노동조합, 시위대, 그리고 여성주의. 결국 “너만 가만히 있으면”이라는 말은, 발화자가 상대의 발언이나 행동을 취사선택 할 수 있다는 권위의 표현이다. 자식이기 때문에, 여성이기 때문에, 은성은 그런 발언의 기회를 박탈당한다. 유일하게 목소리를 내는 은성의 말이 그렇게 막히고 나니, 집안의 다른 사람들은, 특히 여성들은 목소리를 내지 않게 된다.

 

잘라내지 않으면 마모될 뿐이다

맨 처음에 말한 대로, 가정은 사회의 가장 작은 구성단위다. 가정의 분위기가 이렇다면 사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가정이 권위주의적이면 사회가 권위주의적이기 쉽다. 결혼제도를 통해 남성의 권위에 편입한 여성의 존재는 가정 내에서 종속적이 된다. 가정 내에서의 위계는 남성위주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도 좋은가』에서 할머니는, 그리고 큰어머니는 적극적으로 남성(남편, 큰아들 등등)의 권력에 편승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그들을 비판하고 비난할 수 있을까? 사실 그들을 비판하는 건 아무 의미도 없다. 원론적인 이야기지만, 그 다음 행동은 가부장제와 싸우고 가정의 권위와 맞서는 것이어야 한다. 마치 은성이 자신을 위해 그렇게 한 것처럼, 나를 불행하게 하는 것들을 끊어내고 “그러면 안 된다”라고 메시지를 보내야 한다. 그 다음은 그들의 선택이고, 그들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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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좋은가』中 , 생존하기 위해 평생을 남성 권력에 편승해 온 할머니는 또 다른 피해자를 낳는다

내 삶을 고통스럽게 하는 타인의 존재를 끊어내기 위해선 단호한 결의가 필요하지만, 끊어내고 잘라내지 않으면 마모될 뿐이다. 삶이 마모되면, 내 삶은 더 이상 내 삶이 아니게 된다. 나의 삶을 살아내지 못하는데 가족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가족은 내가 어떤 혈연관계를 맺었느냐가 아니라, 내가 누구를 사랑하고, 어떤 사람과 한 집에 살고 싶은가를 나타내는 말이 되어야 한다. 모두의 삶이 자신의 삶이기를, 그리고 모두의 삶에 “평화”가 깃들기를 바란다.

 

글쓴이: 이재민

편집자: Shyv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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