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7일, 페미디아에 한 편의 번역글이 소개되었다. 해당 글은 안나 진(Anna Djinn)이 웹상에 게시한 것으로, 번역된 제목은 “신자유주의, 퀴어 이론, 그리고 성매매 – 성상품화는 어떻게 성 해방의 우군이 되었나”이다. 글의 제목에서 잘 드러나듯이 저자는 ‘성매매’라는 주제를 신자유주의,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과 같은 맥락을 공유하는 퀴어 이론에 연결시켜 다루고 있다. 안나 진은 신자유주의와 퀴어 이론이 성매매를 정당화하고 지속시키는 데 기여한다는 입장을 취한다.(Djinn, 2016[2014])

 

성매매를 정당화하는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다 – 우리의 선택은 자유로운가?

우선 필자는 해당 글에 나타난 성매매와 신자유주의 간의 관계 분석을 매우 흥미롭게 보았으며, 이 부분에서 안나 진의 분석에 상당히 공감하였다. 안나 진에 따르면, “우리의 인간성을 포함한 모든 것들”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사회에서 거래 가능한 것으로 환원되며 인간의 ‘성’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자유경쟁시장에서의 수요와 공급의 논리에 따라 성매매라는 현상을 파악하는데, 이때 성에 대한 수요와 공급은 모두 개인의 ‘주체적인 선택’에 따른 것으로 이해된다. 성판매자들은 경제적 이익을 얻으려는 목적 아래, 합리적인 경제적 행위의 일환으로서 자신의 성을 ‘자발적’으로 판매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자들은 성매매 산업의 착취적인 구조에 대한 고발을 “(성판매자들의) 주체성을 부정하는 것”, 혹은 “(성판매자들의) 기회와 선택을 부인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성매매를 정당화한다.(Djinn, 2016[2014])

일부 성판매자들이 자신의 성판매에 대해 어떠한 종류의 ‘자발적 선택’을 내린다는 사실을 완전히 부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필자는 이때 ‘자발적’, 개인의 ‘선택’, 혹은 ‘주체성’이라는 말들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가 더 깊이 성찰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내리는 많은 선택들 중 온전히 자발적이거나 온전히 강제적인 것이 있을까? 자발적으로 대학에 가거나 자발적으로 직장을 구하고 자발적으로 가족을 꾸렸다고 해서, 그러한 자발적인 선택들이 사회 구조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사회와 개인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형성하는 관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사회구조는 개인이 선택 가능한 범위를 분명하게 제약하며, 동시에 사회구조는 개인의 행위를 통해 생산되고 유지된다.(Young, 2013[2011])

이때 개인이 사회 안에서 취약한 위치에 놓여있을수록 취할 수 있는 선택지의 범위는 좁아진다. 노동시장에서 여성이 놓인 위치, 여성의 몸이 의미화되는 방식, 빈곤이 지속되는 구조 등을 복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안나 진이 주장한 바와 같이 성판매에 대한 개인의 ‘선택’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적 논리는 상당히 문제적이다. 모든 사회구성원들이 동등한 자원과 기회를 가지고 자유롭게 경쟁한다는 신자유주의식 이해는 환상에 불과하며, 개인의 ‘선택’은 한 사회의 구조적 불평등과 분리되어 이해될 수 없다.

 

안나 진이 이해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위처럼, 성매매의 착취적인 구조를 정당화하는 신자유주의에 안나 진이 제기한 비판에 대해서 필자는 십분 공감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본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안나 진이 포스트모더니즘과 퀴어 이론을 해석하는 방식에 있다. 안나 진이 ‘어떤’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과 ‘어떤’ 퀴어 이론을 참조했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이러한 이론들에 대한 안나 진의 이해는 무척이나 협소해 보인다. 그가 주장하는 바에 의하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신자유주의가 성장하고 급진적 사회 비판 세력이 쇠퇴하던 특별히 보수적인 시기에 등장”한, “정치적, 사회적 현실을 혼란스럽게 하는 극도로 보수적인 교리”에 불과하다.(Djinn, 2016[2014])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런 방식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을까? 페미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간의 관계가 파괴적인지, 생산적인지를 두고 많은 논쟁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필자가 보기에 포스트모더니즘은 사회구조에 대한 기존의 우파적, 좌파적, 그리고 페미니즘적 이해를 전면적으로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지평을 열어주는 급진적인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아래에서 필자는 안나 진과는 다른 방식으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이해를 시도해보고자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용어가 주로 사용되는 방식,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이 가진 급진적인 측면 대신 보수적인 측면만을 부각시키는 몇 가지 요소들을 살펴볼 것이다. 이를 위해 필자는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가 혹은 퀴어 이론가로 일컬어지곤 하는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의 논의, 그리고 주디스 버틀러의 이론 해석을 제공하는 조주영의 논의를 주로 참조할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무엇인가?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논하기 위해서는 우선 ‘포스트모더니즘’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페미니즘’이라고 불리거나 분류되는 이론들 안에도 무수한 차이가 존재하듯이, 포스트모더니즘도 단일한 것으로 여길 수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어떤 이론들의 묶음을 곧바로 지칭한다기보다는, 어떤 이론들이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불리거나 분류된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즉, 본질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이론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특정한 이론들이, 특정한 관점과 맥락에서, 특정한 사람들에 의해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분류된다.

주디스 버틀러는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포스트모더니스트’라는 이름은 “한 개인이 스스로에게 붙이는 이름인가, 아니면 (…) 그보다 더 자주 한 개인이 불리는 이름인가?” 포스트모더니스트도 ‘붙여지는’ 이름이기에, 버틀러는 그러한 이름이 주로 어떤 맥락과 조건 아래 붙여지는지 살펴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그 용어가 사용되는 방식으로부터 그 용어를 이해”할 수 있다.(Butler, 1994:35)

주디스 버틀러에 따르면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용어는 주로 다음과 같은 조건절과 함께 등장한다: “만약 담론이 존재하는 전부라면…”, “만약 모든 것이 텍스트라면…”, “만약 주체가 죽었다면…”, “만약 실재하는 몸이 존재하지 않는다면…”.(Butler, 1994:35) 이러한 조건절에는 늘 부정적이거나 공포스러운 결과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다시 말해,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용어는 ‘주체’ 개념에 문제를 제기하거나, 몸을 자연화하는 본질주의적인 관점을 비판하거나, 담론에 대한 분석을 주된 연구 방법으로 삼는 다양한 논의들을 하나의 틀 안에 일반화시킴으로써 손쉽게 비판하기 위한 맥락에서 사용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주디스 버틀러가 보기에는, 하나로 묶기에는 서로 너무 다른 다양한 이론들이 경우에 따라 모조리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분류되는 문제가 생기곤 한다. 이에 버틀러는 “무엇이 포스트모더니즘인가?”, “그것은 어떤 존재 형식을 가지고 있는가?” 등의 질문을 던져볼 것을 제안한다.(Butler, 1994:37) 안나 진이 무엇을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생각하는지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위와 같은 이유들로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에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방식의 토론이 애초에 가능한 것인지에 먼저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Butler, 1994)

 

주디스 버틀러의 ‘주체’ 개념 비판

이제 필자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스트’로 일컬어지곤 하는 주디스 버틀러의 논의를 살펴보고자 한다. 안나 진은 퀴어 이론이 포스트모더니즘과 동일한 맥락에서 등장했다고 서술하면서 “퀴어 이론은 젠더를 수행(performance)으로” 본다는 점을 언급한다.(Djinn, 2016[2014]) 그리고 이미 널리 알려졌듯이, ‘수행성’ 개념을 통해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 페미니즘 이론 등에 접근한 대표적인 이론가는 바로 주디스 버틀러이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주디스 버틀러의 이론이 (안나 진의 표현을 따르자면) “극도로 보수적인 교리”로 오해받는 이유들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바로 그가 ‘주체의 죽음’을 야기한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흔히 포스트모더니즘은 여러 종류의 죽음, 즉 주체의 죽음을 비롯해 “인간의 죽음”, “역사의 죽음”, “형이상학의 죽음” 등을 야기했다는 비판을 받곤 하며(Jane Flax, 1990; Benhabib, 1994 재인용), 이러한 죽음들 때문에 포스트모더니즘과 페미니즘의 만남은 위험한 것으로 여겨지곤 한다.(Benhabib, 1994)

페미니즘 이론 안에서 ‘주체’의 문제는 늘 중요한 자리를 점해 왔다. “여성도 남성과 동일하게 주체가 될 수 있는가, 또는 여성은 어떤 주체가 되어야 하는가라는 문제는 다양한 흐름의 여성주의 이론들 안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문제의식”이다. 이처럼 여성을 남성과 동일한 주체 혹은 새로운 대안적 주체로 만들어 내려는 노력이 전개되는 상황 속에서, 주디스 버틀러는 ‘주체’라는 개념 자체에 문제를 제기했다.(조주영, 2014:76) 같은 맥락에서, 버틀러는 여성운동이 운동의 ‘주체’로 상정해왔던 집단적 정체성으로서의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Butler, 1994) ‘여성’들이 자신을 ‘여성’으로 인식하고 ‘여성’의 이름으로 모이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서,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해체하고자 시도한 버틀러는 “극도로 보수적인 교리”를 설파하는 사람으로 쉽게 오해의 대상이 되었다.

그렇다면 주디스 버틀러는 대체 어떤 이유로 ‘주체’ 개념을 비판한 것일까? 어떤 이유로 그동안 우리가 명백히 존재한다고 믿어왔던 ‘여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 것일까? 버틀러가 ‘주체’ 혹은 ‘정체성’ 개념을 비판한 것은 이러한 개념들이 “항상 동일성 논리, 즉 포함과 배제의 논리”를 따르기 때문이다. “주체가 성립하기 위해, 즉 자신의 동일성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나 아닌 것, 타자를 배제해야만” 한다.(조주영, 2014)

우리는 ‘여성의 경험’, ‘여성의 관점’, ‘여성이 겪는 문제’와 같은 말을 빈번하게 접한다. 그런데 이때의 ‘여성’이란 누구를 의미하는가? 전업주부로서 겪는 어려움을 ‘여성’의 문제라고 한다면, 이때의 ‘여성’은 맞벌이를 하는 여성이나 자신의 노동으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인 여성을 배제하게 된다. ‘여성’의 배우자를 ‘남편’이라고 부른다면, 이때의 ‘여성’은 동성애자 여성을 배제하게 된다. ‘여성’이 임신출산 능력을 갖는다고 말한다면, 이때의 ‘여성’은 불임 여성이나 트랜스젠더 여성을 배제하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동일성과 보편성을 추구하는 ‘정체성’이나 ‘주체’ 개념은 차이를 가진 타자를 배제하고 비가시화시킴으로써 성립된다는 문제를 지닌다. 차이가 발견될 때마다 레즈비언 여성, 흑인 여성, 장애인 여성 등 기존의 범주를 세분화할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세분화된 범주 역시 포함과 배제의 논리를 따를 뿐 아니라 ‘여성’이라는 기존의 범주를 더욱 본질적인 것으로 고정시키는 효과를 낳는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반복적인 수행의 의미화를 통해 구성되는 ‘주체’

‘주체’ 개념이 위와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페미니즘 이론가들은 ‘주체’를 포기하지 못한다. “정치철학이나 윤리학의 영역에서 여전히 주체 개념을 필요로 한다면, 그것은 주체가 언제나 행위성의 토대로 설정되어 왔기 때문이다.”(조주영, 2014:77)

행위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 행위를 하는 ‘행위자’가 먼저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하지만 버틀러는 “행위 뒤에 행위자를 가정할 필요가 없으며”(조주영, 2014:78), “‘행위자’는 행위 속에서 행위를 통해 다양하게 구성”된다고 본다.(Butler, 2008[2006]; 조주영 2014:78 재인용) 이러한 생각은 ‘담론의 외부’가 없다고 보는 버틀러의 관점과 맞닿아 있다. ‘담론의 외부’가 없다는 것은 모든 것이 담론 안에서 사회문화적으로 ‘해석된’, ‘재현된’, ‘구성된’ 방식으로 존재함을 의미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삶의 지배적 양상들을 탈자연화시키는 것”에 관심을 두면서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실체들”이 사실은 어떻게 “문화적인 것”인지, 그것들이 어떻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들”인지를 드러내고자 했다.(Hutcheon, 1998[1989]:10)

위와 같은 맥락에서, 버틀러는 주체가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인 행위가 의미화 과정을 거쳐 개인을 ‘주체’로 만들어낸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때의 ‘주체’가 의미하는 바는 “행위를 고정시키기 위한 장소”로서의 “주어의 자리”에 불과하다.(조주영, 2014:82) 이것이 바로 “퀴어 이론은 젠더를 수행(performance)으로” 본다는 안나 진(2016[2014])의 설명이 가진 의미이자, 우리가 ‘여성’이라는 말을 실재하는 몸 혹은 정체성에 대한 ‘기술’이 아니라 ‘기획된 범주’로서 이해해야 하는 이유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급진적인 정치성

안나 진(2016[2014])이 언급한 것처럼 “포스트모더니즘(혹은 해체주의)은 객관적인 현실이란 없고 모든 것은 무한히 많은 해석들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관점을 취한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포스트모더니즘은(그리고 주디스 버틀러는) 모든 것을 담론에 의해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되고 재현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안나 진의 주장대로 포스트모더니즘은 “어떤 정치 체계나 예술 작품도 다른 것들보다 우월할 수 없다고 주장”하려는 것일까?

포스트모더니즘을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방식으로 이용하려는 이들은 포스트모더니즘으로부터 정치성을 탈각하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이 가진 급진적인 가능성에 주목하는 이들은 정반대의 해석을 제시한다. ‘주체’가 배제를 통해 형성된다는 사실이 이해된다면, 주체를 둘러싼 구성과 삭제의 과정을 추적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중요해진다.(Joan W. Scott, 1988; Butler, 1994:48 재인용) 모든 것이 담론의 내부에서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우리가 그동안 객관적인, 자연적이고 보편적이라고 믿어 왔던 모든 것을 비판의 장으로 가져올 수 있다. 어떤 것이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된 것이라는 말은 그것이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 더 중요하게는 ‘권력’을 가진 개인이나 집단의 관점에서 해석되고 의미화된 것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급진적인 정치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모든 정치 활동이 객관적인 진리를 목표로 이루어질 필요는 없으며, 포스트모더니즘은 우리에게 “영구적인 개방과 재의미화 가능성의 장소(Butler, 1994:50)”를 열어줄 수 있다.

 

글: 권유경 (이화여대 여성학과 석사과정)
편집: 최호연

 

참고문헌

조주영(2014), “‘주체’ 없이 행위성을 설명하기: 주디스 버틀러의 수행성 개념을 중심으로”,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시대와 철학』, 제25권 4호, 73-96쪽.

Anna Djinn(2014), “Neoliberalism, Queer Theory and Prostitution”, The Feminista Hood, https://thefeministahood.wordpress.com/2014/11/08/neoliberalism-queer-theory-and-prostitution/#more-46, “신자유주의, 퀴어 이론, 그리고 성매매 – 성상품화는 어떻게 성 해방의 우군이 되었나”, 윤다온 옮김, 페미디아, http://femidea.com/?p=852, 2016. (접속일: 2016.6.20)

Iris Marion Young(2011), Responsibility for justice,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아이리스 M. 영, 『정치적 책임에 관하여』, 허라금․김양희․천수정 옮김, 서울: 이후, 2013.

Judith Butler(1994), “Contingent Foundations”, Feminist contentions: a philosophical exchange, New York: Routledge, pp.35-57.

Linda Hutcheon(1989), The politics of postmodernism, New York: Routledge, 린다 허천,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과 전략』, 장성희 옮김, 서울: 현대미학사, 1998, 10쪽.

Seyla Benhabib(1994), “Feminism and Postmodernism”, Feminist contentions: a philosophical exchange, New York: Routledge, pp.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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