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상처를 안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아주 잘 알고 있다. 때문에 간혹 상처는 개인의 것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모두가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평범한 것이라고, 그래서 상처는 덮어둔 채 즐겁고 행복한 모습만 보여주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소망 작가의 연재작 <자해클럽>은 그런 상처를 가진 고등학생들의 이야기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자해를 해야 살아갈 수 있는 아이들의 이야기다.

주인공 아영이는 왕따다. 교실의 여왕이 휘두르는 폭력 앞에 무기력함을 느낀 아영은 고통을 끊어버리기 위해 자살을 택한다. 손목을 긋고 거친 펜선 위로 피가 뿜어지는 순간, 더 이상 도망칠 곳도, 자해하며 참아 낼 용기도 말라버린 아영이 자살을 선택한 순간, 자신이 닿을 수 없을 것만 같던 세계의 사람, 지수가 교실 문을 연다. “너 자해하니?” 하며 묻는 지수는 자해클럽에 들어오라고 제안한다. 아영의 피를 머금은 두 사람의 손은, 어떤 결의를 보여주는 것 같다.

 

각자의 상처, 우리의 상처

독자는 일견 완벽해 보이는 지수의 등장에 구원을 기대한다. 신비로운 노을빛과 함께 등장한 지수는 전교 1등에 예쁘고 상냥해서 모든 아이들의 동경을 받는 아이다. 절망의 늪에 빠진 아영을 구해줄 구원자로 지수만큼 적절한 캐릭터를 찾을 수 있을까. 하지만 지수가 제안한 것은 ‘자해 클럽’에 가입하라는 것이었다. 자해클럽은 자해하는 친구들이 모여있을 뿐, 구원이나 위로와는 거리가 멀다. 몇 가지 규약이 있는 자해클럽의 마지막 규정은, “자살하지 말 것”이었다. 그것 이외엔 어떤 구원도, 어떠한 위로도 주지 않고 서로의 자해를 인정하는 모임일 뿐이다.

IMG_5522웹툰 <자해클럽> 中

각자의 상처가 무겁고, 고개를 들어 다른 사람의 상처를 보듬기엔 벅찬 사람들. 그런 아이들이 모인 곳이 바로 자해클럽이다. 찬란히 빛나던 지수는 자신의 자해흔을 보여주며 “익숙해져야 해. 너의 상처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 상처는 온전히 나의 것, 네 상처는 온전히 너의 것. 그리고 ‘우리’의 것”이라고 말한다. ‘너’와 ‘내’가 모여 우리가 된다는 당연한 사실을, 막다른 골목에서 만난 아이들이 깨닫는 것은 아영의 독백처럼 “이럴 때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전혀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타인의 상처를 바라보는 법, 그리고 그 상처를 인정하는 법을 우리는 배우지 못했다.

왕따, 학교 성적, 가정내 성폭력과 그에 따르는 2차가해, 성적 지향. 자해클럽 멤버들이 안고 있는 문제는 결코 가볍지 않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문제도 아니다. 그러나 상처의 경중이나 패인 정도와 같은, 언뜻 객관적인 것 같은 지표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지구상 누구나 그렇듯이, 인생은 처음 겪는 오늘의 연속이다. 상처는, 삶의 무게만큼이나 경중을 따질 수 없다. 종종 “나는 더 힘들었는데 극복했다” 는 류의 조언(?)을 마주하곤 한다. 하지만 그건 그 사람의 인생이고, 싸움이며 상처다. 같은 인생을 사는 사람이 없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 우리는 왜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걸까. 각자의 상처가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

IMG_5505“네 상처는 온전히 너의 것, 그리고 ‘우리’의 것.”

 

상처와 자해

10여년 전, 교육청의 프로그램인 또래 상담사 교육을 받았다. 특기생을 준비한다거나 해서 내신성적이 필요 없는 아이들을 모아서 수업을 듣게 했다. 강사는 그렇게 모인 스무 명 남짓한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친구를 위로하려고 하지 말고, 고쳐주려고 하지 말고, 그저 들어주고 이해해보려 노력해야 한다고. 당시의 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강사에게 나는 ‘상처는 결함이고, 결함은 고쳐야 하는 것 아니냐’고 따지듯이 물었다. 그러자 강사는 내게 “재민씨의 결함은 뭔가요?” 하고 웃으며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우물쭈물하는 내게 강사는 다시 설명했다. “상처는 자연스러운 거예요. 상처가 결함이 되는 순간, 부자연스러운 것이 되어버리죠. 결함은 내부에서 생기니까. 잘못은 내게 없는데, 내가 잘못해서 상처가 생긴다고 믿게 만들어요. 그렇게 되면 상처를 안고 살아갈 힘을 잃어버려요.” 나는 이 말을 이해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자해클럽>의 아이들은, 상처를 공유함으로써 자신의 상처가 자신의 탓이 아님을 인정받고, 동시에 자연스러운 것임을 이해하려고 한다. 약자이기 때문에 받는 폭력이 나쁜 것이지, 자신이 약자인 것은 문제가 없다는 걸 연대를 통해 이해하고 확인한다. 미성년자인 여성이기 때문에, 강자에게 ‘찍혔기’ 때문에 받는 상처, 그리고 더 뛰어나야 한다고 압박하는 주변에게 받는 상처, 사람이 주는 상처. 우리 삶에 흔한 이런 상처들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고통의 소비를 넘어, 고통의 연대로

폭력은 ‘그래도 되는’대상에게로 향한다. 위계의 아래로 흐르는 폭력의 줄기가 막다른 곳에 고이고, 어떤 임계를 넘으면 막다른 길에 있는 사람은 폭력을 휘두르고, 그 폭력의 대상은 자신이 된다. 내가 부숴도 되는 것은 나 자신뿐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력이 자신을 향한다 하더라도 폭력은 지양해야 한다. 파괴는 더 큰 파괴를 부르고, 더 큰 상처를 만든다. <자해클럽>의 아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모두 우리의 상처를 이해해 줄 존재가 필요하다. 나의 상처는 나의 것이고, 너의 상처는 너의 것이지만, 그것을 이해함으로써 우리의 상처로 만들어 혼자가 아님을 깨닫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덮어서 싸매고 감춘 상처는 결국 곪아 썩는다. 상처는 신선한 바람을 쐬어야 한다. 우리가 안고 살아가는 상처도 마찬가지다. 상처를 감추고 덮지 않았으면 한다. 곪아서 썩어 문드러지지 않도록, 나 자신을 파괴하지 않도록.

그래서 때로 말뿐인 위로보다 이해한다는 끄덕임이 더 큰 위안이 된다. 자해클럽은 어떤 해결책을 제시해주지도 않고, 어떤 싸움의 동기가 되어주지도 않는다. 심지어 삶을 크게 바꿔주지도 않고, 고통이 줄어들지 않을지도 모른다. 때로 나를 괴롭게 하는 이의 신발을 핥고, 동경하는 이의 상처를 목도해야 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이해 받았다는 안도감이 삶을 살아갈 이유가 되기도 한다.

IMG_5511<자해클럽> 에서 나타나는 고통의 연대

고통 받고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내가 누군가의 고통의 이유가 아니라면, 나의 잘못이 아닌 일로 고통 받고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상처로 인한 고통을 공유하고, ‘나는 아프다’는 사실을 인정받고 상대의 고통을 인정하는 것. 상처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연대함으로써 서로의 아픔을 이해하는 것. 나의 잘못이 아님을 인정하고, 또 인정받는 것. 시답잖은 해결책에 대한 조언이나, 이미 수도 없이 고민했을 해답을 듣는 것 보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실히 필요한 일이다.

 

글쓴이: 이재민

편집자: Shyv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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