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난주에 문득 깨달았다. 낙태결정권 찬성론자인 친구들 사이에서도, 내 낙태 경험에 대해 얘기한 적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낙태에 대한 낙인과 거짓말, 그리고 수치심을 유발하는 환경을 허물어뜨려야 한다.

약 5년 전, 2010년 9월에 나는 약을 한 알, 그리고 또 한 알 먹었다. 그리고 침대에 하루종일 누워있었다. 그렇게 나는 임신에서 벗어났다. 그것은 꽤 순조로운 경험이었다. 걱정스럽긴 했지만, 그건 그저 연애상황이 좋지 않았고 돈도 없었기 때문이다. 시술 자체는 안도감을 주었다. 만약 시술을 받을 수 없었다면 진정한 트라우마가 생겼을 것이다.

미국 가족계획협회(Planned Parenthood: 자궁경부암 및 성매개성감염 검사, 피임 및 낙태를 포함 광범위한 보건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미국의 비영리기관)에 대한 재정지원을 철회하기 위한 보수진영의 여성혐오적인 십자군 원정이 한창이던 지난 주, 갑자기 어떤 생각이 나를 덮쳐왔다. 내가 단 한 번도 나의 낙태 경험에 대해 얘기한 적이 없다는 것을.

나는 진보적인 도시에 살고 있고, 내 주변 사람들은 모두 여성의 낙태결정권을 열렬히 지지하며, 나의 삶에 대한 고백적인 글을 쓰는 것이 내 직업인데도, 도대체 왜 낙태에 대해서는 추상적인 수준을 넘어서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는 걸까? 심지어 가장 친한 친구들과도. 나는 친구 중 누가 질염이 있는지, 누구의 남자친구가 이상하게 휜 성기를 가지고 있는지, 누가 마약을 한 적이 있거나 아직도 하고 있는지까지 다 알고 있다. 그런데 누가 낙태한 적이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리고 아무도 내가 낙태를 한 적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비밀은 아니다. 그저 아무도 이야기 하지 않는 주제일 뿐.

의식적으로 낙태와 관련한 개인적 경험을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저 얄팍한 혼동의 굴레를 재생산하는 습관같은 것이다. 우리가 낙태를 이야기하지 않는 이유는 정말이지 낙태에 관한 이야기를 아무도 일절 꺼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더욱 지난 토요일, 내 친구 아멜리아 보나우(Amelia Bonow)가 자신의 페이스북 페이지에 당당한 논조로 진솔한 선언을 한 것은 아주 분명하면서도 간단하고, 그러면서도 대단히 혁명적인 일로 여겨졌다.

“1년 전. 나는 매디슨 가에 있는 미국 가족계획협회에서 낙태를 했다. 내게 그 경험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감사한 기억이다 … 내가 오늘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미국 가족계획협회가 받는 재정지원을 철회시키려하는 자들의 서사가 낙태가 아직도 쉬쉬해야 하는 일 이라는 생각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좋은 여자에게 낙태란 어느 정도 슬픔과 수치심, 그리고 후회를 동반한 선택이어야만 한다는 식의 고정관념을 갖고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과연 옳은 것인가? 실제 나는 좋은 사람이며, 낙태 덕분에 더 없이 완벽한 행복을 느꼈는데도? 강요로 인해 억지로 엄마가 되지 않아서 행복해하면 왜 안 되는 것인가?”

“낙태는 아직도 쉬쉬해야 하는 일이라는 생각” 이라는 말에 나는 머리를 얻어 맞은 것 같았다. 진보적이고, 거침없고, 낙태결정권을 지지하는 페미니스트조차 자신의 낙태를 감춘 채, 오직 구석에서만, 쉬쉬하며, 신뢰할 수 있는 최측근에게만 은밀하게 말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고 있다니. 그건 즉, 결국 낙태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방식에 맞춰 낙태를 정의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처럼 낙태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냉혈한 괴물로 취급하거나 낙태가 필요할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낙태시술은 언제나 끔찍한 트라우마를 남기고, 고통스러우며,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선택이라고 주장하며 공포심을 주입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괴물이 아니다. 그 과정에 고통만 있는 것도 아니다. 사실, 삶이란 형언할 수 없이 복잡한 것이고, 자궁이 있는 사람의 신체는 무조건적으로 자신의 것이며, 낙태에 관한 각각의 이야기는 낙태를 겪는 사람처럼 모두 고유한 면면을 갖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트라우마를, 어떤 사람들은 후회를 얻는다. 그러나 많은 경우엔 내 경험처럼 행복을 얻게 된다.

아멜리아의 허락을 구한 뒤, 나는 그의 글을 핵심 그 자체인 해시태그와 함께 트위터에 올렸다. 쉬쉬하지 말고 #낙태경험을외쳐봐(# ShoutYourAbortion)

반응은 즉각적이고 압도적이었다. 마치 무수한 사람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만 같았다.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사람들도 지금까지는 전혀 들어보지못했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전혀 모르던 사람들도 슬픈 이야기부터 담담한 이갸기까지 광활한 우주만큼이나 다양한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_Letha(@lethacolleen)2015.9.21

만약 혹시라도 임신을 한다면, 나는 낙태를 할 것이다. 내겐 나만의 삶을 살 권리가 있다. 그 삶에 출산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낙태경험을외쳐봐

_TugboatAnnie(@sacarlin48)2015.9.21

몇 번의 유산 끝에, 수년이 흐른 45살의 나이에 나는 그 결정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정말 힘들었다.
#낙태경험을외쳐봐

_msmanet(@msmanet)2015.9.21

낙태 덕분에 내 삶을 되찾았다. 성폭행으로 인한 상처의 치유를 시작할 수 있었다. 후회 한 적은 없다. 단 한번도.
#낙태경험을외쳐봐

_Asshole_Inksult(@MeanNormaJean)2015.9.20

낙태를 하지 않았다면, 연애 5년 차에 나를 강간하기 시작한 그 남자로부터 영원히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낙태경험을외쳐봐

_Credible Phillips(@Jomegsallan)2015.9.21

슬픈 사연은 없다. 아이를 원치 않았고 키울 형편도 아니었다. 진지한 생각없이 만나고 있던 남자친구와의 피임 실패였다. 단 한번도 후회 한 적 없음.
#낙태경험을외쳐봐

 

이 모든 낙태는 정당하다. 그 어떤 낙태도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다. 

‘좋은’ 낙태와 ‘나쁜’ 낙태란 없다. 낙태는 하나의 의료 시술일 뿐이고, 생식의료행위는 그저 의료행위일 뿐이며, 태아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내 몸은 내 것이며, 내 몸 안에서 뭘 키울지는 내가 결정한다.

최대한 큰 목소리로 우리의 이야기를 전함으로서, 성인 여성과 어린 소녀들, 그리고 임신이 가능한 모든 젠더들(특히 가난하거나 개발이 덜 된 지역에 살거나 종교색이 강하고 보수적인 가족을 가졌다면 더더욱)의 삶을 (때론 말 그대로) 파괴하는, 낙태에 대한 낙인과 거짓말, 그리고 수치심을 유발하는 환경을 허물어뜨릴 것이다. 단, 안전을 위협받거나 지지받지 못할꺼란 두려움 없이-우리 나라가 각종 무기로 중무장한 반지성적 공화당 지지자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에 대한 보편적인 걱정을 넘지 않는 선에서- 낙태 경험을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것은 특권이라는 사실 또한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나는 그래도 되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내 알림창은 피칠갑한 태아 사진과 살해 위협으로 터질 지경이다. 트위터야 원래 그런거지만) 조용히 묻혀진 반면, #낙태경험을외쳐봐 해시태그에 주류 언론의 긍정적인 관심이 집중되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옳기 때문이다. 사회는 아주 느리게 진화하지만, 바람직한 방향으로 진화한다. 낙태는 보편적인 일이다. 낙태는 현재에도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낙태는 누구나 합법적으로, 그리고 안전하게 받을 수 있어야 한다. 낙태는 우리가 얼마든지 큰 소리로 이야기 할 수 있는 일이다.

 

나는 전혀 유감스럽지 않다.

원제: I set up #ShoutYourAbortion because I am not sorry, and I will not whisper @The Guardian
원문 게재일: 2015.09.22
최종 수정일: 2016.07.11
원저자: Lindy West(린디 웨스트)
번역: 단감
편집: 제이미/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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