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에는 영화 <비밀은 없다>의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반’이라는 말이 유행했던 2000년 초반, 나는 중학생이었다. 성애에 막 눈 뜨기 시작할 나이, 여중에 다녔던 우리는 이성애보다 동성애적인 사랑에 더 가까이 있었다. 몇 반 누구랑 누구가 사귄다더라, 누가 누굴 좋아한다더라, 걔네 이반이래. 이반이 뭐야? 레즈! 이런 대화가 은밀히 오고가던 십대 소녀 시절, 소녀들의 첫 연애감정은 현실세계의 남자 중학생 또는 남고생보다는, 그들이 좋아하는 가수, 만화책 속 주인공, 그리고 동성 친구들을 향해 있었다.

점심시간이면 우르르 몰려 매점에 갔고 여름이면 물총놀이를 했다. 날이 서늘해지면 교실에서 소타기 말타기를 하며 신나게 뛰어다녔다. 유행하던 만화책의 신간이 나오면 돌려가며 읽었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하염없이 음악을 들었다. 흔하지 않은 외국 가수를 많이 아는 친구가 있으면 동경의 대상이었다. 묘한 경쟁의식에, 지지 않으려 더 특이한 음악을 찾아들으려 애썼다.

낙엽이 떨어지는 것만 봐도 숨넘어가게 웃는다고? 그 반대다. 낙엽이 떨어지기만 해도 인생이 몹시도 무상한 것 같아 통곡을 하던 그 때, 2000년, 2001년. 새천년이 시작되면 지구가 멸망할 줄 알았던 그 때. 교복 치마를 어떻게든 줄여보려 애 쓰며 한 단 접어 올리다가 종아리를 대차게 맞고 학교라는 감옥에서 교복이라는 죄수복을 입고 귀밑 머리 재단당한다고 서러워하던 그 때.

10대 시절, 여자들끼리의 사랑과 우정 사이

그 때 우리는 난 생 처음 어른과 아이의 경계에 서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시작했다. 그 모든 것을 친구와 함께 하는 것이 좋았다. 무엇을 하든 단짝과 함께였고, 어디를 가든 단짝과 함께 가야 했다. 그 때는 그것이 무엇인지조차 잘 몰랐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친구와의 우정에 목숨걸던 그 감정과 관계는, 첫 연애에 가깝다. 사랑이라고까지 말할 수 없을지 몰라도, 달팽이가 더듬이로 서로를 확인하듯 최초로 타인을 더듬고 나 자신을 확인하는 관계를 시작하는 십대 소녀 시절. ‘우리 처음엔 모두 서로 사랑하는 법을 몰랐지 바보처럼 … 보고 싶은 내 친구들’ 노래 가사처럼 소녀시절 친구들과의 감정은 사랑과 우정의 경계를 언제나 넘나든다. 이성애적인 세계에 진입하기 이전의 연애는 그렇게, 여성간의 연대와 연애와 우정이 뚜렷하지 않은 것이었다.

스무살이 넘어서서 연애를 시작하고 나자 자연스럽게 같은 성별인 친구들과 웃고 떠들고 장난치는 관계로부터 조금씩 멀어졌다. 우리는, 멀어지는 줄도 모르고 멀어지고 있었다. 그 허전함, 공백을 연애, 이성애적 사랑으로 메꾸려 했다. 어떤 곳이 비어있는지도 모르고서, 그랬다. 채워질 리가 없다. 채워지지 않는 빈 곳은 언제나 나를 어떤 종류의 향수에 빠지게 만들었다. 아련하게 멀어져버린 무언가를 찾고 싶지만 찾을 수 없었고 늘 목이 말랐다.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러웠던 관계가 끊어지는 것, 그 분절은 우리의 의지인가? 점처럼 제각기 끊어지고 흩어진 여성의 육체가 필요한 또 다른 어떤 것의 의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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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에 걸쳐 단절을 겪어야만 하는 여성의 삶

기실 여성은 평생에 걸쳐 단절을 경험한다. 태어났을 때 어머니와 단절하며, ‘여성’성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남성’성의 거세를 경험한다. 어머니는 딸을 자기혐오적인 여성혐오로서 양육하며, 소녀들 간의 우정은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이성애’ 시장에 밀려 ‘종료’당한다. 직장에 들어가면 남성중심적인 문화에 치여 명예남성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직면하며, 결혼 이후엔 남편 수발과 육아에 쫓겨 급기야 ‘여성’성과도 결별하고 가정 내 주된 희생자의 위치에 머물게 된다. 고립되고, 점이 된다. 인간이 인간 사이에 있어 인간이라면, 여성은 다르다. 여성은 점이 되는 것에 익숙해져야만 한다. 여성의 몸으로는 누구와도 인간적으로 교류하지 못할 것이라는 암시를 끊임없이 주입받는다. 우리의 학창시절을 돌아보며 보다 애틋해지고 향수를 느끼는 것, 단지 어리고 순수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단절되고 파탄나지 않은, 우리 본성에 보다 친숙한 관계 맺기의 경험에 대한 기억 때문일 것이다.

지니와 오기, 민진이와 미옥이 또한 그런 관계 맺기를 했던 것이다. 민진이가 아버지의 외도로 괴로워할 때 미옥이 또한 함께 괴로웠다. 자기 아버지가 민진이 아버지의 운전기사여서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지만, 그래서 민진이가 내민 빵을 밀어버리며 ‘조까’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민진이가 왕따당하고 괴롭힘 당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다시 손을 내밀 줄 아는 아는 아이, 미옥이. 두 소녀는 어느 샌가 닮아가고 있었다. 웃는 얼굴도 머리모양도 비슷해진다. 자매같기도 하고, 연인같기도 하다.

그런 사랑은 사랑이 아닌가? 사랑은 ‘남자’와 ‘여자’가 해야 사랑인가? 사랑은 무엇인가? 연애감정을 품는 사랑은 왜 반드시 이성의 사랑이어야 하는가? 반드시 이성의 사랑이어야 함은 도대체 누구를 위함인가? 무엇을 위함인가? 임신과 출산의 가능성이 전제됨만이 사랑의 필수조건이라는 이해는,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는 참으로 다양한 형태의 사랑을 떠올려 보건대 참으로 기묘한 기준이다.

과연 우리에게 허락된 사랑이란 무엇인가?

이성애와 동성애에 대한 이상한 차별을 꼭 말하고자 한다면, 그 전에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가부터 이야기해야만 한다. 사랑에 등급을 두어 차별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자들은, 마치 사랑이란 정의내릴 수 있으며 손으로 만질 수 있으며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게 가능하기나 한 것처럼. 그 얼마나 말도 안되는 소린지, 여보란 듯 민진이와 미옥이는 그저 사랑을 제 몸으로 흐르게 할 뿐이다. 우정 같기도 하고 자매애가기도 한 사랑,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은 wild rose hill은 에덴동산을 닮았다. 하얀 찔레꽃이 흐드러지게 핀 언덕에 앉아있는 두 소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기 이전의 이브같다.

‘에덴동산에서 행복하게 살던 이브가 쫓겨났다’ 이유는 ‘스스로 죄를 지어서’ 하지만 죄를 지은 것은 실은 아담이며, 자신의 죄를 ‘이브가 유혹했다’며 덮어씌운 것이라면? 미옥이와 민진이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그 자리에 묻혔으며, 손소라는 종찬에게 농락당하고 아이까지 낳았다. 에덴동산에 딸을 묻은 연홍은 종찬이 저지른 죄의 흔적들 속에서 몸부림친다. 고통의 시작과 끝 모두 종찬 아닌가. wild rose hill의 이브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낸 것은 뱀도 누구도 아닌 아담 그 자체, 종찬이다. 종찬에게는 죄를 만회할 기회가 있었다. 자기 일에 방해된다고 하여 누군지 확인도 않고 죽여버릴 것이 아니라, 연홍과 딸에게 버림받을 것을 각오하고 용서를 구하기, 그가 기만한 모든 이들에게. 종찬은 물론 손쉽게 ‘민진이를 죽이는 것을’ 선택했다.

그러므로 모든 문제의 원흉인 종찬, 오직 그만을 응징하는 연홍은 영화 ‘비밀은 없다’의 가장 강력한 메신저다. 만약 이 이야기를 남성의 시각으로 풀었다면 상당히 달랐을 것이다. 설명이 필요한 부분은 생략하고, 종찬을 정당화하기 위한 부연은 과도하게 추가되었을 것이다. 종찬은 유혹당하며, 이용당하며, 연홍에게 버림받는 비련의 ‘남주인공’-뱀과 이브의 유혹에 빠진- 아담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브의 시각에서 본다면, 연홍과 민진이, 미옥의 시점에서 본다면 종찬이야말로 ‘뱀’그 자신이며 에덴동산에서 이브가 쫓겨나게 한 모든 비극의 시작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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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의 전복은 하나의 사건을 두고 아담과 이브를 달리 보는 데에서 시작된다. 그러니 그 전복된 관점이 ‘일부’ 관객들에겐 오죽 불편할까! 가녀린 ‘딸’을 구출하는 부성 판타지를 기대했을 터, 그러나 감독은 그 기대 충족시켜 줄 생각이 애초부터 없었던 것이다. 영화의 첫 장면은 딸의 장례식 장면과 연결되니 영화는 결국 딸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다. 아내는 자식을 잃어 실의에 빠지긴 커녕 ‘당신이 내 새끼 죽였다’며 남편을 저주하고 뺨을 때리고 침까지 뱉는다.

비밀은 없다. 실제로는 이렇다. 아버지는 바람을 피우고, 딸이야 죽든 말든 관심 없다. 이 영화에서 종찬은 여러 번 울지만, 그 눈물에 관객은 집중할 수 없다. 어딘가 위선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섹스동영상이 유출되고 선거에서 질 까봐 전전긍긍하던 애비, 종찬의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이, 종찬의 위선적 눈물의 이유가 관객에게 드러나는 순간이다. 비밀은 없다. 룸싸롱에서 딸 뻘 소녀들을 찾는 평범한 대한민국 애비들, 모두 종찬의 또 다른 얼굴이다. 그 같은 성폭력에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자들, 또한 여기에 속해 있다. 당신의 소녀를 선택해 주세요, 나는 당신의 소녀, 101개의 상품을 보며 침흘리는 그들, 당신들, 너희들. 모두 또한 종찬의 또 다른 모습이다. 새삼스럽지 않다.

소녀는, 소녀도, 사랑을 한다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공감이 가는 눈물이 있다면 – 연홍의 자식 잃은 울음을 제외하고 – 옥이의 눈물이다. 친구가 죽는 모습을 보고 무섭고 슬퍼서 우는 눈물이 아니다. 놀랍고 두려워서 우는 눈물이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 연인, 자매를 잃은 옥이의 눈물은 고통과 괴로움의 눈물이다. 하냥 슬픔에 빠지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복수하고, 죽이고, 분노하는 인간의 눈물! ‘소녀’들, 세상 즐거울 것도 재밌을 것도 많은 동시에 존재의 괴로움에 막 눈뜨기 시작할 나이, 그녀들은 슬퍼서 울기보다 괴로워서 운다. 인생의 쓴 맛을 처음 겪는 소녀들은 삶이 고달파서, 그 괴로움에 터질 듯 하여 운다. 민진이처럼, 가난이 버거운 옥이처럼. 남성언어로 쓰이는 소녀에 익숙한 그들에겐 낯설고 이상하겠지만 그게 소녀, 그게 인간이다. 민진이를 죽인 자를 차로 밀어버리는 미옥의 복수, 그게 소녀의 사랑이다. 소녀도 사랑을 한다. 복수도 한다. 그 모든 서사의 중심에서 남자가 빠져있다는 것, 여성의 시각으로 풀이된다는 것, 그래서 어떤 이들에겐 이 영화가 불편하다. 세계관을 뒤트니까. 지운 것을 들이미니까. 고기가 말을 하니까.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브는 죽어서야 그 곳에 돌아와 묻힌다. 찔레꽃이 희게 핀 언덕, 이브가 묻힌 자리, 그들이 사랑했던 자리에서 연홍과 미옥은 다시 만난다. 희망은 있다. 잃어버린 관계가 다시 살아날 때, 우리의 역사는 이어지고 기록될 것이다. 살아남은 미옥이 연홍에게 민진이의 역사를 전한 것처럼.

 ‘멍청하다고 했어요, 엄마가 멍청하다구…. 그래서 지가 지켜줘야 된다 그랬어요’

*안타깝게도 ‘비밀은 없다’ 서울 시내 상영이 거의 끝나간다. 이 사회가 얼마나 남성중심적인 언어에 익숙한지, ‘비밀은 없다’의 흥행률이 이를 방증한다. 대한극장에서 상영을 이어가고 있으니, 여성의 언어로 바라보는 세계를 스크린으로 확인하고 싶다면 어서 가시라. 영상미와 영화음악 또한 몹시 아름답다. 스크린으로 볼 수 있을 때 보는 것을 추천한다.

글쓴이:Agnes(희원)
편집: 진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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