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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에 처음 백치미라는 말을 알게 되었을 때는,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지는 못하였지만 그 말이 담고 있는 부정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느낄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을 알게 된 이후로는 혹여 내가 그 많고 많은 아름다움 중에서 ‘백치미’를 가진 이로 분류라도 될까 전전긍긍 두려워했다.

매일 아침 거울 앞에 서서 반문한다.

멍청해 보이나? 혹은, “나 멍청한가?”

많은 이들이 여성에 대한 외모 품평과 이에 따른 차별에 대해 반발심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어떤 것이 부당한 외모 차별이냐, 혹은 예외가 어디까지 적용될 수 있느냐에 따라 의견 차이는 있겠지만 그 자체로 어느 정도 보편적 상식으로 받아들여진다. 반면, 어떤 여성이 ‘똑똑하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고 그에 따라 차별받는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달라질까? 이쯤에서 궁금해진다. 왜 유독 여성을 대상으로만 ‘백치미’라는 말이 거론되는 것인지, 또 왜 다수의 대중은 ‘여성’ 연예인의 무지에 대해서만 그토록 힐난하고자 하는지 말이다.

최근 메갈리아를 둘러싼 지루한 논란(비판)에 의하면, 페미니스트는 모름지기 준여성학자 수준의 지적 숙련이 필요한 것처럼 일컬어지는 듯하다. 여전히 여성들은 단지 갑갑한 브라를 벗거나, 밤길의 부당한 위협과 불안에 대하여 이야기하기 위해서 너무나 많이 공부하여야 하며 너무나 많은 책을 읽어야 한다.

왜 나이와 경력을 가진 똑똑한 여자만 발언할 수 있나

한국사회에서 여성의 사회적 발언권이 그나마 보장 받을 수 있는 때는 나이와 경력으로 무장한 전문가로 임한 경우이다. 비전문인, 학위가 없는, 어린, 혹은 늙은, 여성의 발언은 무시되거나 배제되기 쉽다. 만약 정치가 일상에서 분리되지 않은 일이라면 여성은 일상의 곳곳에서 정치적 배제를 경험한다.

여성의 직관이나 느낌은 ‘비논리적적’이고 ‘중요하지 않은’ 정보로 취급되며 급기야 부정당하기 일쑤다. 그 예가 ‘예민한 것 아니냐’ ‘착각한 것 아니냐.’ ‘오해가 아니냐’는 식의 경험에 대한 직접적인 부정이다. 여성의 경험과 느낌이 사회에 받아들여질 때는 오직 정돈된 해석과 갈무리된 의견을 감정을 배제하여 제시할 때 뿐이다. 물론 받아들여진 의견이 반영되기까지는 더욱 오랜 과정이 필요하다.

주체적인 여성이 된다는 것은 아빠보다 잘난 사람이 되는 것인가?

테두리 밖에 있는 여성들이 테두리 안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더 똑똑하고 뛰어난 사람이 되는 수밖에 없다. 주체적인 여성은 무엇을 의미할까. 엄마같이 살지도, 아빠같이 살지도 않는 엄마보다도 아빠보다도 더 잘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여성들은 사회의 일원으로서 당당히 자기 권리를 찾기 위하여, 내몰리다시피 공부와 학위, 능력을 쌓아야 하는 강박에 시달린다.

집에서 살림’이나’ 보는, 혹은 손님을 위해 억지웃음을 지어야 하는 여성에 대해 사회는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가. 우리는 어떤 교육을 받고 있으며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많은 여성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멍청하다’는 평가와 무시이지 ‘못생겼다’는 평가와 무시가 아니다. 남성주의 사회는 여성들을 못 생겼다는 이유로 배제하기 보단, ‘능력이 없다’ ‘현명하지 못하다’ ‘끈기가 없다’는 식으로 배제해 왔다.

물론 능력주의나 나이주의는 여성만이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능력주의 같은 경우, 경제적 불평등을 비판하는 반자본주의적 담론의 단골 주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성을 억압하고 차별하기 위하여 이용되는 능력주의와 나이주의는 이 같은 담론들과는 구별되어 설명될 필요가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여성에 대한 억압은 단지 인간에 대한, 사람에 대한 불평등의 발현으로만 환원할 수 없는 유구한 역사가 있으므로 단순하게만 바라볼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누구나 똑똑하고 싶다, 그런데 똑똑하다는 건 무엇인가?

누구나 어떤 면에서는 똑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똑똑함의 기준이 사회·보편적 기준 즉, ‘지적 능력’, 자세하게는 ‘사회’경험, 학위, 외국어능력 등과 일치할 때, 여성적 주체로 길러진 존재가 이 ‘똑똑함’의 자격을 얻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다. 지적 능력은 경제적, 사회문화적, 유전적 환경 등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지금, 현대를 살아가는 다수의 여성이 직업이 없거나 열악한 비정규 서비스직에 종사하고 있으며 여전히 집안일에 허덕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이 가능토록 하는 공고한 남성주의 구조 속에 살고 있다. 뛰어나게 젊고 영민한 여성들도 많지만 그들의 활약을 응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모두가 잘나고 멋진 사람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여성주의 담론을 이야기함에 있어 똑똑함이 담론을 주도할 수 있는 무언의 자격증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 그리고 ‘똑똑함’이라는 자질은 결코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나누어가질 수 있는 행운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받아들여야만 한다.

과연 어떠한 우연을 타고 나서 다행히 잘 교육 받은 덕분에, 앞서가는 사회적 가치와 정치적 올바름을 획득할 수 있는 이에게만 페미니즘은 허락될 수 있는가? 이것을 허락하는 자는 누구인가? 메갈리아를 둘러싼 논란(비판)을 찬찬히 살펴보다 보면, 여성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본질적으로 여성의 언어여야 할 페미니즘의 영역에서조차 많은 여성들이 발언권을 빼앗긴 채 배제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또한 지금까지도 이러한 배제가 계속해서 시도되고 있는 현실을 확인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분야는 남성중심적으로 발전했으며, 여성이 이미 짜여진 구조 안에서 풍부한 성과를 올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여학생의 성적이 높다거나, 전문직에 여성비율이 높다거나 여성의 평균학력이 높아진다는 것은 중요한 지점이다. 하지만 ‘그들이 뛰어나기 때문에’ 그들이 발언할 수 있으며 ‘논리와 이성’으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듯 여기는 작금의 분위기는 옳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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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치의 언어를 두려워 말라

누구에게나 그가 여성일지라도, 혹은 무식(무지無知)하더라도 사회적 발언권은 평등하게 보장되어야 한다. 오히려 사회는 자신의 이야기를 언어화할 수 있는 특정 권력(능력)을 가지지 못한 이들의 목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여야 하며 그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언어화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다양성이며 민주주의다.

오늘날의 부당함에 맞서기 위해서 여성들은 ‘더 잘나고 더 똑똑한 여자’가 되어야 할 것을 요구 받고 있다. 반대자들과의 논쟁에 맞서기 위해 더 많은 책을 읽고 더 많이 공부하고 더 많은 성과를 내야 한다. 때로는 남성들보다 더 세세한 부분까지도 신경 써야 할 것이고 그것이 고통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현실의 목표가 ‘잘나고 똑똑’해지는 것일지라도 이 길의 최종 목적지는 백치의 여성도 자유롭게 말하고 존중 받을 수 있는 사회, 즉 못난 사람을 위한 페미니즘이라는 점이다. 백치의 언어를 두려워 말라. 페미니즘은 모두를 아울러 해방하는 길이다. 그 길을 감에 있어 백치의 언어라 하여 잘난 사람의 언어보다 하등 가벼울 이유는 없다.

작성자: 김서린
편집자: 진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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