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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컨대, 미친 듯이 울렸던 메신저 알림음을 의식적으로 외면하듯, ‘Girls Do Not Need a Prince’가 지나가기를 조심히 기다리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중요한 시기임은 분명하지만 무언가 첨언하지 않으려했다. 누가 잘했는지를 못했는지 따지는 일이 나의 마음을 그다지 흔들지 못했으며, 누가 진짜 페미니스트냐 아니냐를 판단하는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최대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나 나의 침묵을 잘못 읽은 이에게 질문 폭탄을 받았다. 용기를 내어 메신저를 열어보았다.

“범죄자들을 옹호해?”
“왜 이 사건에 참여하지 않아?”
“이 분위기를 어떻게 생각해?”
“대답하지 않는 이유가 있어?”
“넌 우리랑 같은 편이야?”
“그래도 걔네들이 잘못한 건 인정하지?”

그렇다. 나는 폭력의 현장의 속에 기꺼이 들어가 싸우지 않았다. 오히려 경계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떤 이들과 마찬가지로 현장에 매혹을 느끼지 못했고 더 이상 선과 악을 구분하는데 지쳤다. 더 이상 환호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지도 모른다. 내가 무슨 말을 해야 도움이 될지 그 어떤 확신도 없었다. 하지만 이 단 한 가지, 간절한 것들은 오래간다는 사실 하나는 알고 있다. 그리고 좀 더 오래가는 것을 선택한 소수의 사람들의 길을 다수의 사람들도 따르게 되리라 믿는다.

진짜 페미니스트인가 가짜 페미니스트인가,
혐오자인가, 혐오자가 아닌가,
유해한가, 아닌가.

갑론을박하는 분위기 속에서 지난 2월에 있었던 미식축구 경기 슈퍼볼에서 비욘세가 선보인 퍼포먼스가 떠올랐다. 그 퍼포먼스는 거대한 스케일로 시청자를 압도하는 데서 끝나지 않았다. 댄서들은 흑표당(Black Panther Party)을 상징하는 검은 베레모를 쓰고 탄띠를 두르고 나와 무대에 섰다. 그들이 치켜든 주먹은 1968년 멕시코 올림픽에서 성조기 게양되는 내내 머리를 숙이고 주먹을 든 선수들의 주먹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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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대 가운데서 비욘세는 1억 2천만명의 시청자들에게 흑인 여성이 가진 강인함과 연대 의식이라는 메시지를 매우 효율적이고 예술적인 방법으로 선보였다. 또한 전날 공개된 해당 곡의 뮤직비디오에서는 복구되지 못한 뉴올리언즈의 모습과 공권력이 흑인들을 부당하게 대하고 있다는 암시를 볼 수 있었다. 이 공연과 앨범을 통해 비욘세는 흑인이자 여성으로서 상속한 억압을 이야기하고 그 이야기를 넘어 다른 사람들과 다른 사람들을 연결하고자 했다.

물론 말과 상징은 실제와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기에번역할 수 없는 부분들이 존재한다. 또한 흑인 여성으로써 단 1초도 살아 본 적이 없는 이들이 체감할 수 없는 지점 또한 분명히 있다. 그럼에도 그의 말은 매우 시의 적절했으며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의미 있는 내용이었다. 비욘세는 사람들이 공포에서 해방되기를 긴급히 요청했다. 그렇기에 현실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더욱 더 환호와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이에 비욘세는 “나는 우리의 안전을 지켜주는 경찰과 그들의 가족에 대한 엄청난 존경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하나 명백히 해두자면, 경찰의 잔인성과 부당성은 반대한다. 두 가지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라고 첨언했다. 하지만 그녀의 퍼포먼스와 뮤직비디오는 어떤이들에게 즉각 뜨겁고 충실한 반대여론을 일으켰다. 예술이라는 가상의 울타리 안에서 벌어진 퍼포먼스를 두고 연방하원의원 피터 킹과 전 뉴욕시장 루돌프 줄리아니는 비욘세의 공연은 경찰을 향한 공격이라고 비판했다. 어떤 이들은 비욘세가 순수한 스포츠경기에 정치적인 메시지를 부여하고 예술의 본질적인 의미를 격하시켰다며 비욘세를 비판했다.

트위터를 중심으로 비욘세 반대 집회 모집이 결성되었다비욘세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비욘세는 인종주의자이며 백인을 차별하고 경찰을 반대하고 흑표당을 미화하고 폭력을 옹호하는 위험한 사람이 되었다. 당시 이 분위기는 사뭇 진지하고 뜨거웠다. 심지어 비욘세가 진짜 페미니스트이냐 아니냐를 두고 사람들은 토론을 벌였다. 불쾌감을 느낀 경찰과 보수진영은 비욘세 공연 보이콧을 외쳤고 일부 선량한 시민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폭력은 나쁜 것이라며 걱정을 했다.

그러나 비욘세의 공연과 앨범으로 어떤 폭력이 일어났는지 증명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현대 스포츠 무대에서 정치적이지 않은 스포츠를 찾는 일이 어렵듯 우리 삶에서 어떠한 것들이 정치적이지 않은지 판단하는 일은 무의미한 일이 되었다. 더 나아가 횡단하지 못할 절대적으로 지켜져야 할 순수의 영역은 없다. 고작 반년이 지난 현재, 그의 퍼포먼스를 두고 반대하던 여론은 쥐죽은 듯 사라졌다.

반대여론이 사라진 곳에 남은 것은 무엇일까? 말할 수 없었던 것을 말할 수 있는 엔터테이너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노래 가사처럼 그 무대는 말 그대로 죽여줬고(slay) 그가 우리들에게 말을 건 방법은 아무도 해치지 않았다. 그 퍼포먼스는 앞으로도 길게 오랫동안 남을 하나의 사건이 될 것이다. 비욘세가 말한 대로 가장 강력한 예술은 대개 오해를 받는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 인류 역사 상 시대가 지나도 오랫동안 살아남아 이야기를 남긴 행동들은 하나 같이 모두 문제작들이었다. 그리고 과거에 그 문제작들을 재단하려하고 지배하려던 신념은 현재엔 지배력을 상실했거나 점점 더 그 힘을 잃고 있다.

반대의 목소리들이 의미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모든 것이 다 지나가고 나니 반동적인 의견들 속에서도 충실성이 탄생하고 자신들 나름의 혁신을 꾀할 수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부류의 힘은 매우 일시적이며 그 일을 만들어낸 사건보다 오래가지 못한다. 그 목소리는 한 때 매우 강렬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 강렬함이 꼭 진정한 변화와 연결되지는 않는다. 진정한 변화는 빗발치는 시대의 요구와 길거리에서 외마디 비명이 넘칠 때, 예전에는 눈에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던 것들이 만들어내는 효과이다. 그 격변 앞에서 누가 진짜 페미니스트인지 아닌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정치, 스포츠, 예술 횡단하지 못할 불가침의 영역도 존재하지 않는다.

겨우 여섯 달이 지나 어떤 목소리가 더 오래가는 목소리인지 분명해졌다. 우리는 어쩌면 그 순간에도 알고 있었고, 지금도 알고 있다. 공적인 행동에서 가시적인 승리가 필연적인 결과물이 아닐지라도 강력하고 지속적인 의지력이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글:현전우일

편집: 진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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