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남성들아,

그대들은 인형을 원하는가,

늙지도 않고 화내지도 않고

당신들이 원할 때만 안아주어도

항상 방긋방긋 웃기만 하는 인형 말이오.

나는 그대들의 노리개를 거부하오.

내 몸이 불꽃으로 타올라 한 줌 재가 될지언정

언젠가 먼 훗날 나의 피와 외침이 이 땅에 뿌려져

우리 후손 여성들은 좀 더 인간다운 삶을 살면서

내 이름을 기억할 것이라.”

– 나혜석, 「이혼고백서」 중  (1934)

  

#2. 윤동주의 누이

이 시리즈는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소개하며 시작했습니다. (페미디아, 짓밟힌 이들을 위한 판타지 법학 #1. 셰익스피어의 누이, 2016년 5월 10일, http://femidea.com/?p=70). 버지니아 울프는 셰익스피어에게 그와 비슷한 재능을 가진 누이가 있었다면 그녀의 삶과 죽음은 어땠을지를 상상함으로써 셰익스피어의 누이를 짓밟는 세상을 고발한 페미니스트입니다. 그런데 셰익스피어는 대영제국주의의 상징이고 페미니즘은 제3세계 유색인종들을 착취하는 서양 백인 여성들의 전유물이 아니냐고요? 제국주의자들이 들여온 몹쓸 신문명이 단군 할아버지때부터 지켜온 민족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위협하고 있다고요? 페미니즘과 탈식민주의가 만나는 지점을 살펴보겠습니다.

위대한 시인 윤동주, 위대한 시인 셰익스피어

일제에 의한 식민 지배의 아픔을 겪은 한국의 역사는 지구촌 곳곳을 자신의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침략과 약탈을 일삼은 대영제국의 역사와는 분명히 다릅니다. 식민 치하에 태어나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기도하며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려 했던 시인 윤동주(1917~1945, 한국)는 항일운동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반면, 급속히 팽창하는 제국에 태어나 한평생 시인이자 극작가, 배우로 성공적인 삶을 살았던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 영국)는 은퇴 후 미리 유언장도 작성해 둘 수 있을 만큼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합니다. 죽음 뒤에도, 윤동주를 기억하는 비한국인은 많지 않은 반면 셰익스피어를 기억하는 비영국인은 지구촌을 가득 채우고 있지요.

윤동주에게 그와 비슷한 재능을 가진 누이가 있었다면 그녀의 삶과 죽음은 어땠을까?

위대한 시인이 될 수도 있었던 셰익스피어의 누이가 셰익스피어에 비해 짓밟힌 삶과 죽음을 지냈던 것처럼 위대한 시인이었던 윤동주 역시 셰익스피어에 비해 짓밟힌 삶과 죽음을 지냈습니다. 그렇다면 식민주의의 짓밟힘을 겪은 한민족에게 여성의 짓밟힘을 고발하고 성차별과 성폭력에 도전하는 페미니즘은 과연 무슨 의미일까요? 저는 짓밟힘(억압)의 상호교차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윤동주의 누이를 불러보려 합니다.

짓밟힘의 상호교차성

짓밟힘의 상호교차성(intersectionality)은 두 개 이상의 짓밟힘이 서로 겹쳐 고유한 짓밟힘을 이루는 현상을 설명한 개념으로, 인종차별과 성차별의 교차점에서 평등을 고민한 흑인 페미니스트 비판법학자 킴벌리 크렌쇼(Kimberlé Crenshaw, 1959~, 미국)가 1989년에 개척한 법이론입니다. 킴벌리 크렌쇼는 흑인 여성들이 미국 사회에서 경험하는 짓밟힘을 설명할 때 인종차별과 성차별을 따로 떼어놓고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에 주목하며 이중, 삼중으로 짓밟히는 이들을 위한 새로운 지평을 엽니다.

상호교차성 이론에 따르면  흑인여성이 겪는 짓밟힘은 단순한 인종차별, 단순한 성차별과는 다른 고유한 짓밟힘입니다. 인종차별의 렌즈를 통해서만은 흑인 여성들이 흑인 남성들에 비해 겪는 짓밟힘을 설명할 수 없고 성차별의 렌즈를 통해서만은 흑인 여성들이 백인 여성들에 비해 겪는 짓밟힘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또한 인종차별의 프레임 자체가 흑인남성이 백인남성에 비해 또는 흑인여성이 백인여성에 비해 차별받는 프레임이고 성차별의 프레임 자체 역시 백인여성이 백인남성에 비해 또는 흑인여성이 흑인남성에 비해 차별받는 프레임이라 인종차별과 성차별을 따로 떼어놓아서는 흑인여성이 백인남성에 비해 짓밟히는 (인종차별과 성차별이 교차한) 지점 역시 온전히 볼 수 없습니다. 이 때문에 인종차별과 성차별이 맞닿은 지점에서 출발해야만 흑인 여성들이 겪는 고유한 짓밟힘을 포착하고 언어화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식민주의와 성차별주의가 맞닿은 지점에서 이중의 짓밟힘을 겪었을 윤동주의 누이

킴벌리 크렌쇼의 이론을 근현대 한국 여성들의 삶과 역사에 적용해 보겠습니다. 위대한 시인 윤동주가 식민주의에 짓밟혀 신음할 동안 위대한 시인이었을지 모르는 윤동주의 누이는 식민주의 뿐만 아니라 성차별주의까지 겹친 이중의 짓밟힘을 겪었겠지요. 그녀는 어떤 삶을 살았고, 또 죽음 뒤 누구에 의해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까요?

윤동주의 누이는 나혜석이고, 최영숙이고, 황윤석이다

저는 윤동주의 누이가 탁월한 독립운동가이자 여성운동가, 예술가였으나 당대의 뿌리 깊은 성차별에 의해 병들고 버림받은 채 행려병자로 숨진 나혜석(1896~1948, 한국)이었고, 조선 최초로 스웨덴에서 경제학사를 취득하고 조국의 노동자와 여성들을 위해 일하려 귀국했으나 성차별 때문에 일자리를 못 구한 채 콩나물 장사를 하다 요절한 최영숙(1905~1932, 한국)이었으며, 해방 한국 최초의 여성 판사이자 1950년대에 벌써 페미니즘 법학을 고민한 선구자였지만 시집살이와 과로에 시달리다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 황윤석(1929~1961, 한국)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나혜석 초상화

최영숙 편집본 2

황윤석 판사

나혜석, 최영숙, 황윤석은 어떤 삶을 살았고, 또 죽음 뒤 누구에 의해 어떻게 기억되고 있나요?

근현대 한국의 지독한 성차별주의는 윤동주의 누이였던 나혜숙, 최영숙, 황윤석의 삶을 짓밟았습니다. 이들은 식민주의와 성차별주의의 이중 짓밟힘을 겪으면서도 아름답고 치열한 삶을 살았고 뛰어난 업적을 쌓았지만, 가족과 사회, 조국에게 짓밟혀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또 죽음 뒤에는 아예 역사 바깥에 묻혀 기억되지 않거나 소녀들에게 ‘여자가 너무 잘나면 저 여자처럼 남자들한테 미움 받고 팔자가 드세어지니 공부도 사회 생활도 적당히 하라’고 경고하는 방식으로 기억되기도 합니다. 윤동주의 누이를 짓밟는 사회는 여성들에게는 사회가 아니며 윤동주의 누이를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여성들에게는 역사가 아닙니다. 그런 사회, 그런 역사는 인정할 수 없습니다. 성차별이 없는 세상, 성폭력이 없는 세상을 불러 올, 짓밟힌 이들을 위한 판타지 법학은 셰익스피어의 누이뿐 아니라 윤동주의 누이도 함께 부르며 출발합니다.

추신: 유복한 가정에 태어나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거나 하늘이 내린 듯한 재능을 가진 극소수의 원조 알파-걸들을 다룬 이 글의 엘리트주의가 불편하시다고요? 저도 불편하군요. 다음 편에선 억압의 상호교차성 개념을 한 차원 더 확장시켜보려합니다. #3. 윤금례, 윤금이, 그리고 이름 모를 당신들을 통해 식민주의, 성차별주의 뿐만 아니라 경제적 불평등까지 삼중으로 짓밟힘을 겪은 윤동주의 또 다른 누이들을 불러보겠습니다.

글쓴이: 김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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