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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의 페미니스트들이 회고하는 몬트리올 참사

(원제: The Montreal’s Massacre: Canada’s Feminists Remember by Julie Bindel)

 

* 이 기사는 2012년에 저널리스트 줄리 빈델이 1989년 몬트리올 참사를 기억하는 캐나다 여성주의자들과 나눈 대화를 기록한 기사를 옮긴 것입니다.

1989년 12월 6일, 한 20대 남성이 ‘페미니즘이 싫다는 이유’로 캐나다의 에콜 폴리테크니크(École Polytechnique)에 재학중이던 여학생들을 14명이나 무차별 살해했습니다.

참사가 있은 후, 매체, 심리학자, 정신과 의사들은 이 사건에서 여성들은 범죄의 타깃이 아니었으며 묻지마 살인의 우연한 희생자였다고 일축했으며, 더 나아가서 살해범 또한 불평등한 사회의 희생자라고 주장했습니다. 캐나다 페미니스트들이 회고에 따르면, 사람들은 그 당시 몬트리올 참사가 정치적으로 해석되는 것을 불편하게 여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참사는 범죄학자들에 의해 ‘혐오범죄’(hate crime)로 분류되었고 여성주의 학자들 또한 사회에 만연한 여성혐오(misogyny)로 인한 범죄로 이 사건을 결론지었습니다.

1991년, 사건 발생일인 12월 6일은 “여성에 대한 폭력을 기억하고 이에 대항하여 행동하는 국가 기념일”(National Day of Remembrance and Action on Violence Against Women)로 지정되었습니다. 같은 해, 남성들을 중심으로 여성에 대한 폭력을 방지하기 위한 “하얀 리본 캠페인”(White Ribbon Campaign)이 창설되었습니다. 1989년 몬트리올 참사를 되돌아보면서, 현재도 이와 비슷한 아픔과 진통을 겪고 있는 한국 사회를 더 큰 맥락에서 진단하는 계기가 되기를 번역자는 기원합니다.

 

 

날이 춥고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1989년 12월 6일, 한 젊은 남성이 캐나다 몬트리올 에콜 폴리테크니크(École Polytechnique) 대학 교실 안으로 총을 휘두르며 난입했다. 60명 남짓 되는 공학과 학생들은 대응할 시간조차 없이 모두 교실 밖으로 나가라는 명령을 들었고, 총을 든 남자는 여성들을 쏘기 시작했다. 6 명의 여학생들은 즉사했고, 세 명은 부상을 입었다.

살해범은 당시 25살인 마크 레핀(Marc Lépine)으로, 그는 사건 당시 합법적으로 구매한 미니 14 소총(Mini-14 rifle)과 사냥용 칼로 무장했다. 사건 전에 그는 총기 판매원에게 “작은 사냥”을 하러 간다고 말했다. 레핀은 이전에 에콜 폴리테크니크에 지원했으나 입학 허가를 받지 못하였고,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그는 전통적으로 남성들이 차지했던 지위와 직책에서 여성이 일하는 것에 대해 분노했다. 발포하기 전에 그는 이렇게 외쳤다. “너네는 모두 페미니스트 일당이야. 나는 페미니스트가 싫어!” 나탈리 프로보스트(Nathalie Provost)라는 이름의 여학생이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야. 나는 남성들과 싸워 본 적도 없어”라고 말하며 저항했지만, 레핀은 어쨌거나 그녀에게 총을 쐈다.       

이 총기범은 대학 건물의 복도, 식당, 다른 교실들을 쭉 다니면서 저격할 여성들을 물색했다. 14명이 죽고 10명이 부상을 당한 후에야 레핀은 자기 자신에게로 총을 겨누었다. 총격전 속에서 의도치 않게 4 명의 남성들 또한 다쳤다.  

페미니스트 활동가이자 몬트리올 신문 라 프레스(La Presse)의 칼럼니스트인 프란신 펠레티에(Francine Pelletier)는 참사 소식을 듣고선 “참으로 어안이 벙벙했다(totally floored)”는 표현으로 그의 감정을 묘사했다. 더욱이, 경찰이 살인범의 주머니에서 발견한 살해 표적 명단에 그 자신의 이름이 적혀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오늘 이들은 죽은 목숨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일을 너무 늦게 시작했기 때문에) 시간이 부족해서 이 과격 페미니스트들은 운 좋게 살아남았다.”

총격이 있은 직후에 여러 매체의 논객들과 준(準)심리학자들은 레핀이 정신 나간 사람이고, 여성들은 총격의 특정 대상이었다기 보다는 그저 그 자리에 우연히 있었던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라 프레스 신문에 의하면, 퀘벡의 오뗄-디유(Hôtel-Dieu) 병원의 정신과 의사는 레핀이 “희생자들만큼이나 무죄일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점점 더 무자비해지는 사회의 희생양이다”라고 진술했다. 사건 당시 활발히 활동 중이던 단체 “성차별에 반대하는 남성들”(Men Against Sexism, 페미니즘에 찬성하는 남성 단체-번역자)의 창시자인 마틴 뒤프렌 (Martin Dufresne)은 “남성들의 권리증진 단체들의 엄청난 성장이 있던 때였지만, 대중은 정치적인 설명 방식을 매우 불편해 했다”고 회상했다. (이 기사에서 “정치적”이란 용어는 남녀의 성적 차이에 관한 성 정치를 일컬음-번역자) 

경찰은 기자 회견에서 모방 범죄를 부추길 위험성 때문에 살인범의 자살 유서를 공개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레핀의 진짜 범행 동기를 무시하는 이러한 처사 때문에 펠레티에는 그 자살 유서를 손에 넣겠다고 결심했다. 몇 달 뒤 그녀는 익명으로 전달된 유서의 사본을 편지로 받았다.  

“내가 만약 오늘 자살한다면 그건 경제적 이유 때문이 아니라 정치적 이유 때문임을 당신은 알겠는가. 내 삶을 항상 망쳐왔던 페미니스트들을 내가 직접 하늘 나라로 보내버리려 한다. 난 그 잔소리꾼들을 없애버리기로 결심했다.”  

퀘백 대학의 강사이자 박사 과정생인 멜리사 블레(Mélissa Blais)는 몬트리올 대학살과 사건의 반(反) 페미니즘적 맥락에 관한 권위적 학자이다. 그녀는 연구를 위해 1989년에 활동하던 페미니스트 몇 명을 인터뷰했고, 그들이 몬트리올 사건에 대해서 책임감을 느낀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사건 이후에 그들은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또 다른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 침묵했다.  

“2000 년쯤 내가 페미니스트가 되었을 때, 여전히 그 때의 공격에 대해서 정치적인 용어로 이야기하길 주저하는 사람들을 보며 놀랐다. 여성주의적 설명을 묵살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모든 것을 정신 나간 한 남자의 심리상태로 환원시키는 것으로 보였다(번역자 강조).”

펠레티에는 레핀의 행동이 굉장히 정치적이라는 점에 동의하며, 범인은 자신이 그 날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고 믿는다. “난 그 여성들이 나를 대신해서 죽었다고 항상 느꼈다. 그들 중 일부는 심지어 페미니스트들도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이 남학생들에게 종속된 존재가 아닌 동료라고 단지 믿을 정도의 용기가 있었을 뿐이다.”   

몬트리올 참사가 일어났을 때, 임신 중절 찬성 운동(pro-choice movement)이 한창이었다. 참사가 있기 6개월 전, 퀘벡 출신 여성 샹딸 다이글(Chantale Daigle)은 폭력적인 파트너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임신을 중절하지 못하도록 명령한 캐나다 대법원의 판결을 뒤엎어, 중요한 승리를 얻어낸 주역이었다.    

참사는 남성 폭력을 근절하기 위한 여러 캠페인들의 원동력이 되었고, 국제적인 연대를 이루어냈다. 당시 필자는 사건 2일 후 런던 트라팔가 광장에서 열릴 집회를 조직하는 단체의 일원이었다. 펠레티에는 사건이 캐나다 여성 운동에 끼친 영향이 지대하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89년 12월 6일에 나는 큰 환멸을 맛본 작은 페미니스트 한 명일뿐이었다. 그 전까지는 모든 게 너무 쉽게 이루어졌다. 참사 이후에 우리는 깨달았다. 많은 남성들이 페미니스트에 대한 혐오를 키워왔으며, 우리는 그간 페미니스트들이 이루어온 업적에 대해 아주 큰 대가를 치러야 했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최근 몬트리올에서 시간을 조금 보내면서, 활기차게 성장하고 있는 여성주의 운동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연륜이 있는 여성들이 젊은 세대를 교육하면서, 1989년 이전 캐나다 페미니즘의 전형적 특징인 급진주의로 돌아갈 것을 장려했다. 그 당시엔 부권(父權) 단체(father’s rights organisations)가 조직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들은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한 기득권과 특권을 행사한다는 사실을 거부하려 했다. 그래서 그 반대 급부로 급진적 여성운동이 대두되었던 것이다.   

캐나다에선 12월 6일이 “여성에 대한 폭력을 기억하고 이에 대항하여 행동하는 날”(Day of Remembrance and Action on Violence Against Women)로 제정되어 있으며, 이제 이 만행이 일어난 지  23주기가 된다(기사가 작성된 2012년을 기준으로-번역자). 곧 죽은 자를 기억하는 시위와 기념식이 열리고, 그리고 눈물 또한 있을 것이다. 작고한 여성주의 작가 안드리아 드워킨(Andrea Dworkin)이 남긴 말을 인용하고자 한다. “우리 각자가 마크 레핀이 죽이려 했던 바로 그 여성이 되어보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다(It is incumbent upon each of us to be the woman that Marc Lépine wanted to kill-번역자 강조). 우리는 이 명예와, 이 용기로 살아나가야만 한다. 우리는 두려움을 쫓아내야 한다. 우리는 견뎌내야만 한다. 우리는 창조해야만 한다. 우리는 저항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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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게재시기: 2015년 12월 3일
최종 수정일 : 2016년 5월 25일
출처: guardian.com (http://www.theguardian.com/world/2012/dec/03/montreal-massacre-canadas-feminists-remember)
원작자: Julie Bindel
번역자: 스콘
편집자: Mi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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